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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붉은 마음 스러져 달빛으로 내려앉으니

백산심론(百山心論) 1강 10장 열산 월악산

by 여의강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습니다'

-마의태자, 삼국사기



월악산 발치를 휘도는 충주호


월악산(1097m)을 다녀왔습니다.


오르내리는 경사도에 으악,

멋진 풍경에 또 한 번 으악,

악소리 절로 나는 산이더군요.


월악산은 충북 충주, 제천, 단양과 경북 문경에 걸쳐있는 국립공원입니다.

동으로 소백산과 단양팔경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문경새재와 속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북으론 월악산 그림자가 충주호(제천에서는 '청풍호', 단양에서는 '단양호'라 부르자하는)에 잠겨 휘돌아 나갑니다.


설악, 치악, 운악, 삼악과 더불어 속칭 국내 5대 악산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16개의 험준한 산봉우리와 기암괴석, 송계계곡, 용하구곡 등 폭포, 소와 담이 어우러진 깊은 계곡과 천년 전설을 품은 신령스러운 산이기도 합니다.


달뜨는 밤이면 최고봉인 영봉에 비추인 달빛이 아름답다 하여 월악산이라 불린답니다.



중주호 전경


0650, 과 OB 월 정기산행으로 3명이 사당에서 산악회 버스에 올랐습니다.


겨울에는 눈따라 봄에는 꽃 따라 산을 다닌다는데,

바람 거센 봄의 문턱에 월악을 찾았습니다.


보덕암 언덕의 고목


월악산에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려있습니다.


이들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 전해지고, 일제강점기 민족혼을 깨우기 위해 이광수 선생과 유치진 선생이 각기 소설 '마의태자', 희곡 '개골산'의 문학작품으로 만들어 동아일보에 연재되기도 하였답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신라 최후의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마의태자에 대한 영상이 방영되기도 했지요.



덕주사


종합하여 정리하면,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하자 아들인 태자 김일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반대합니다.

고려 왕건은 신라를 회유하기 위해 경순왕에게 그의 장녀인 낙랑공주(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는 다른)를 시집보내는데, 그녀는 경순왕 보다는 태자의 기개에 반하게 되어 부자(子)와 적국 공주 사이에 3각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답니다.


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에게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 하였고,


경순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라며 항복을 택했습니다.


경순왕은 무릎 끓어 부귀를 이어갔고, 분개한 태자는 항전파들을 이끌고 동생인 덕주공주와 함께 하늘재 넘고 충주 제천 거쳐 양평과 인제 지나 금강산(혹은 설악산)에서 신라 부흥 위해 항거하다 삶을 마감합니다.

궁을 떠나며 평생 베옷을 입고 산 그를 후세에 마의태자라 이름 붙여주었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의 후손은 여진으로 건너가 훗날 중국을 통일한 금나라의 시조(始祖)가 되는 대반전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중봉 오르는 길


끝이 왔을 때, 저항하다 스러지는 것과 투항하여 부귀를 누리는 것 중 무엇이 옳은가 하는 것은 나라의 흥망에서나 일상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선택의 문제이지요.


여말선초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하여가'를 부른 이방원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라는 '단심가'로 답한 정몽주, 과연 누가 옳은 것이었을까요?


여하튼 덕주공주는 이곳 월악산 기슭에 남아 덕주사를 짓고 거대 암벽에 마애불을 만들어 오라비에 대한 그리움과 망국의 한을 달랬고, 마의태자는 공주와 헤어지며 마애불이 보이는 미륵사(지금은 절터만 남은)에 불상을 만들어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하니 남매의 애틋한 정이 깊었나 봅니다.


그때 그 붉은 마음들이 달빛으로 스러져 밤이면 월악 영봉에 안타까이 내려앉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애불과 영봉


대형버스는 들머리까지 진입 못해 수산리 마을 어귀에서 산객들 내려줍니다.

거센 봄바람이 무채색 벌판에 휘몰아칩니다.


동부지역 산불 소식에 조속히 불길이 잡히기 바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길을 나섭니다.

작은 동네와 사과 과수원 지나 완만한 오르막이 한참 이어집니다.

가끔 깎아지른 월악 봉우리 몇 개가 하늘 사이로 아스라이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30여 분 쉬지 않고 걸으니 소형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들머리가 나타납니다.



들머리 전경, 멀리 보이는 월악 봉우리들


겨울에는 거꾸로 된 고드름 핀다는 보덕굴 가진 아담한 보덕암에 서니 언뜻 충주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약명높은 '백만 송이 계단'이 피어납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난 가파른 산길에,

천 길 절벽 위로 아슬아슬 실같이 이어진 능선 위에

어마 무시한 산바람이 내내 얼굴을 후려칩니다.


푸리리리 휘유우웅 우우후우훙 우훙우훙~~~



백만송이 계단과 보덕암, 시루떡 바위


하봉에서 간신히 몸 가누고 뒤돌아보니 푸른 호수 아련하게 이어져 나갑니다.


월악산이 힘든 것이 뾰족한 봉우리 3개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경사가 심해 계단에 서면 거의 수직으로 눈앞에 또 계단이 닿습니다.


절벽에 붙은 한줄기 난간에 의지해 바람 부는 허공을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계속 뒤따라 오는 청풍호수와 아스라이 펼쳐지는 소백산 속리산 줄기들이 짜릿함 더해줍니다.



하봉으로는 길, 하봉서 바라본 충주호


하봉, 중봉 지나 정상 영봉 향하는 길 만만치 않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듯 빡센 오르막길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바닥은 얼음이고 그 위로 흙과 낙엽이 덮여 있어 매우 미끄럽고 위험했습니다.

흙인지 알고 잘못짚었다가 기어코 앞으로 미끄러져 코를 깰 뻔했습니다.

다행히 젊어 배운 유도의 전방낙법 기술을 몸이 기억해 다치진 않았지요.



하봉, 중봉 지나 영봉 오르는 길


마지막 하늘길 구비구비 테크 올라 영봉에 닿았습니다.


힘들게 올라온 만큼 사방 트인 정상 서니 기쁨도 배가 되었습니다.


그림처럼 펼쳐진 청풍호 보석처럼 빛나고

하늘바람 맘껏 맞으며 정상 만끽했습니다.


따듯한 양지 찾아 명품 샌드위치 개성 곶감에 삶은 달걀과 밤, 컵라면으로 호사 누립니다.



영봉 마지막 계단, 정상석, 충주호, 백두대간이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


그리고 시작된 내리막,


수직으로 올라왔으니 수직으로 내려갈 각오는 했지만,

발이 계단 위에 있을 뿐 거의 허공에 떠서 수직 하강하는 기분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했던가 없다 했던가?'

그 와중에도 끝없이 이어진 백두대간과 절벽 위 소나무들이 멋지게 다가왔습니다.

양지바르고 유순한 주능선에는 어김없이 봄이 속삭이고 있었지요.



백두대간과 수직계단, 봄내음 가득한 능선길


뒤에서 보는 영봉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오를 땐 뾰족했지만 내릴 때 보니 병풍처럼 넓게 펼쳐져 있고

마애불 능선 옆으론 가파른 암반이 계곡으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한참을 내려 드디어 덕주공주 전설 있는 마애불에 닿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고도하는 자애로운 여성상이었는데

맞은편에 지었다는 마의태자 불상은 산에 가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주사 방향에서 본 영봉과 암반, 마애불


덕주 계곡 따라 덕주사에 닿았습니다.


소박한 산사 뒤로 장엄한 영봉 우뚝 서있습니다.

영봉에 내려 앉을 달빛과 공주의 바람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가뭄으로 계곡 수량은 많지 않았고 조릿대가 바람에 낮게 몸을 움츠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경칩이라 찬 바람을 뚫고 계곡 한편에선 봄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신라 전설과 화끈한 바람, 악소리 나는 경사, 푸르른 청풍호와 기암 준봉을 경험한 멋진 산행이었습니다.



덕주사와 영봉


바람은 하늘에 있지만

지나는 길은 가슴에 있네


바람은 산에서 불지만

소리는 가슴을 적시네



붉은 마음 스러져

월악 영봉

달빛으로 내려앉으니


그래도 가야지

그래도 가야지


바람 따라

달빛 따라



청풍호


*2022년 3월 5일 몹시 바람이 거센 봄날이었습니다.

*수산리~보덕암~수산리능선~하봉~중봉~영봉~주능선~마애불능선~마애블~덕주사~덕주계곡~덕주골휴게소 11km 7시간의 산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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