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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산, 안개와 운무, 곰탕과 봄비

백산심론(百山心論) 2강 2장 12산 유명산

by 여의강


삶은

속도가 아닌

방향,



그러니


빨리 보다는


잘하는 쪽으로.



비오는 유명산


유명산(862m)을 다녀왔습니다.


안갯속 걷고 걸어 봄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유명산과 용문산 솔로 연계 산행,

생애 최초 1일 2산 도전이었습니다.



유명산 중턱


약속을 하면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지요.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기도 하고요.


수 주 전 안내 산악회 공지 보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신청했는데 어언 그날이 왔습니다.


당일 오후의 비 예보는 산행에 대한 고민보다는, 동해 산불로 우리의 산들이 타들어 가는 것이며 그 불과 싸우는 이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차라, 오히려 산불진화에 도움이 되겠지라는 위안을 주었습니다.


누가 시켜하는 일도 아니니, '가다 정히 힘들면 중간에 내려오더라도 일단 가자'라는 생각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결정은 기억에 남을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안개젖은 등산로


유명산(有明山)은 경기도 양평군과 가평군 사이에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1989년)의 국립 자연휴양림으로 유명한 산입니다.


정상에 서면 멀리 북한강과 청평호를 비롯해 용문산, 화악산, 명지산 등의 모습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남한강이 굽어나갑니다.


백두대간 오대산 두로봉에서 갈라져 나와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로질러 흐르다 두 강이 만나는 지점인 두물머리에서 끝나는 167km의 '한강기맥(漢江岐脈)'이 계방산, 발교산, 용문산과 이곳 유명산을 지나 양평 쳥계산으로 흐르기에, 산꾼들에게는 '한강기맥 종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지요.


유명산은 '마유산(馬遊山)이라 하여 말들을 놓아기르는 곳이란 고유 지명이 있었는데, 70년대 이 산을 종주하던 팀이 이름을 몰라 고민하던 중 일행 중 홍일점인 젊은 여성 진유명 씨의 이름을 따 '산에 이름이 없으니 유명산이라 부르자' 했고 그 산행 후기가 일간지에 실린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 불리게 되었답니다.



유명산 자연휴양림(산림청 자료)


0650 사당에서 산악회 버스에 올랐습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내려앉았고 창밖에는 음유시인 레오날드 코헨의 'Famous Blue Raincoat'가 풍경이 되어 흐르는 듯했습니다.


한 때 즐겨 거닐던 회한의 뉴욕 맨해튼 42번가의

빛 거리가 연상되어 잠시 상념에 젖었습니다.



잿빛 거리


처음 해보는 1일 2산이라 혼자 뒤처질까 걱정되더군요.

이 기회에 한계를 넘어보자는 도전의식도 있었구요.


총 8시간의 산행 일정을 '유명산 정상 11시까지, 용문산 정상 2시까지'로 나누어 나름 시간 계획을 잡았습니다.


청평호 지나 37번 국도 구비구비 돌아 농다치 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양반이 시집보내는 딸을 위해 오동나무로 장을 만들어 머슴 등에 지어 이 고개를 넘는데, 남몰래 딸내미를 흠모하던 머슴은 심술이 나서 여기저기 장을 부딪쳤다지요. 그래서 애가 탄 양반이 '농다칠라, 농다쳐'라고 말한 데서 '농다치 고개'가 되었다는군요.



농다치에서 배너미까지


고개 정상 휴게소에 가건물이 몇 개 있고,

길 건너 곧바로 산행이 시작됩니다.


산길은 안개로 가득 차 있더군요.



농다치고개 휴게소와 유명산 들머리


산객들은 이런 날을 '곰탕'이라 부른다지요.


긴 계단과 비에 젖은 낙엽 가득한 흙길 이어집니다.

풍경은 시계 제로에 가깝고 안개와 운무에 가린 이름 모를 나무들이 오솔길 옆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습니다. 사진 몇 컷 찍다 보니 어느새 일행 십여 명은 저만치 앞서가고 보이지도 않더군요.


아무도 없는 빈 산을,

안갯속에서 홀로 걷게 된 것이지요.



안개 속 등산로


생각이 많아지는 시점입니다.


한참을 올라 능선에 서니 안개는 산 밑으로 가라앉았고 소나무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지만, 가랑비까지 바람에 흩날리며 몸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오후로 예정된 가는 비 소식에, 비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요.


길은 낙엽에 덮여있고 하늘은 비에 젖어있고 시야는 운무에 가려있어 그야말로 오리무중, 허공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꿈과 환상인 '몽환'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분위기더군요.



몽환적 풍경


주변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산새 소리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나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 빗소리뿐이었지요.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건가?'


의구심 들 즈음 나타난 중간 기착지 소구니산 표지석.


쉴틈도 없이 급한 내리막과 큰 바위 얼굴 지나 비에 젖은 흙길 한참 동안 올랐습니다.



소구니산과 유명산 가는 길, 큰바위 얼굴


희뿌연 운무 속에 유명산 정상이 나타났습니다.

1030이니 예정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용문산과 한강이 장관일 전망대는

온통 흰색 장막으로 가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상과 흰 장막에 가려진 전망대


서둘러 인증 하고 삼립빵 하나 입에 구겨 넣은 채 용문산 시발점인 배너미 고개로 향합니다.

조금 내려오니 말을 길렀을 법한 평원이 보입니다.

지금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사용한다는데

안갯속에 가려져 비바람만 몰아치고 있습니다.


완만한 경사의 임도 따라 내려가는 길 역시 곰탕이었습니다. '곰탕' 보다는 더 진한 '설렁탕'이나 아예 '순댓국'이라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짙은 안개입니다.


김승옥 선생의 '무진기행'에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안개가 이러했을까 생각해봅니다.



활공장


한참을 가다 아무래도 내려가는 길이 아닌 듯싶어 램블러(등산지도 앱)를 켜보니, 좌측으로 빠져야 할 길을 지나 20분 정도 알바(길을 잘못 들어 헤맨다는 산객들 속어)를 하고 있더군요.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 다행이다'

자위하며 다시 되돌아 올라 바른 길 만납니다.


이때부터 소달구지 다닐듯한 아늑한 임도 이어지며, 비에 젖은 나무들과 멀리 산그리메가 운무 속에 모습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도와 운무 속 산그리메


그렇게 유명산과 용문산이 만나는 배너미 고개에 도착하니 12시,

알바를 했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걸은 덕분에 예상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명산 끝나고 두 번째 용문산 앞에 두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고개 주막에 걸터앉아 막걸리라도 한 사발 했겠지만, 기상환경 여의치 않아 오히려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잠시 한숨 돌리고 용문산 향해 출발합니다.


그 길에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요.



배너미 고개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



그러니


천천히

오래오래.



용문산 향하여


*용문산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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