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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비에 젖어 안개에 젖어 상념에 젖어

백산심론(百山心論) 2강 3장 13산 용문산

by 여의강


놀리테 티메레


빗방울이 굵어졌고

산길은 물길로 변했습니다.


안개와 곰탕이 진해지면서

몸은 젖고

마음은 심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마라

두려워마라



용문산 곰탕


용문산(1157m)을 다녀왔습니다.


용문산은 경기도에서 네 번째 높은 산으로 양평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한강과 홍천강에 둘러싸여 있고 800m 이상의 봉우리만 15개 이상이 한데 모여 산세가 매우 크고 당당하지요. 특히 정상 동쪽에 있는 용계와 조계 등 뛰어난 경관을 지닌 계곡이며 기암절벽을 이룬 연릉과 암봉이 소나무와 어울린 산세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경기의 금강이라고 일컬어졌다 합니다.


미륵의 지혜라는 '미지산(彌智山)'으로 불리었으나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龍門山)'으로 바꿔 불렀다지요. 특히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며 심은 지 10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네이버, 위키백과).



여름 용문산 전경(네이버)


유명산에 이어진 용문산행,


방수용 바람막이 재킷을 걸치고

배낭도 방수천으로 덮어 비에 대비합니다.


배너미 고개 바로 옆으로 용문산 향하는 길 보이지만,

산은 안개와 운무에 흠뻑 젖어있었고 빗줄기까지 굵어져 앞을 가늠하기 어렵더군요.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뿜는 심호흡과

일정한 보폭으로 마음과 몸 추스르며 쉬지 않고 리듬 탔습니다.


'후흐으흡, 푸후후우, 저버억저버억

후흐으흡, 푸흐후우, 저버억저버억'



용문산 가는 길


안갯속에 비 맞으며 한참을 걷습니다.


어여쁜 몽환적 분위기는 언뜻언뜻 전설의 고향으로 바뀌며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누군가 소복 차림으로 스윽 나타날 듯도 했지요.

아름다움과 무서움은 통한다 했던가요.


도킨슨 선생의 '이기적 유전자'를 떠올리고

'놀리테 티메레(두려워말라)'를 되뇌면서

오히려 그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즐기자 맘먹고 나니 한결 편해집니다.



곰탕 속진풍경


닥친 환경은 그런 편한 마음과 달랐습니다.


큰 오르막과 작은 내리막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빗길 안개길 장시간 걷다 보니 먼저 신발과 바지가 젖으며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비에 젖은 길


긴 오르막 끝나며 용천 스카이밸리에서 군부대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만납니다.

이곳 산 중턱까지는 차로 올라올 수 있기에 용문산 최단 등산로로 사용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짙은 안갯속 희미한 포장도로가 뱀처럼 누워있는데,

빗방울은 더욱 굵어지고

세찬 비바람 피할 곳 전혀 없는

허허벌판 천둥벌거숭이 바람의 언덕입니다.



용천 스카이밸리 상단길


'일단 모라도 먹어 원기를 돋우자.'


뜨끈한 국물이 간절했지만 준비해 간 컵라면을 끓일 상황이 아니었지요.

김밥을 꺼내 빗물과 함께 입에 구겨 넣습니다.

.

'이 나이에 이 무슨 개고생이람'이라 자책을 하는데,

'누가 하라고 시켰어요?'

라는 비아냥 소리 들리는 듯합니다.


몇 날을 뛰다 갑자기 멈춰 선 포레스트 검프처럼,

불현듯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집에 가려면 산을 넘어야지.'


김밥 씹으며 도로 따라 올라갑니다.

용문산 정상 1.35km 팻말이 서 있는 작은 오솔길이 보이더군요.


여기까진 그래도 계획한 시간에 맞추어왔지만,

정상에 2시까지 가려면 기상악화와 초행길인지라 시간이 넉넉지 않아 발길 재촉했습니다.



용문산 이정표


짙은 회백색 장막,


산길 접어들고 머지않아 전망대가 나타났지만

역시 시계제로 상태였습니다.

좁고 험한 흙 바위 길은 빗물로 파이고 무너지고 질퍽대며 발목을 잡았습니다.

미끄러운 길을 오르고 내려 나타난 용문산 장군봉 이정표 보고 좌측으로 나아갑니다.


온몸은 비와 땀에 젖었고 헝클어진 산길은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가도 도무지 정상가는 길 같지가 않아 램블러를 보니, '아뿔싸!' 지도 상 엉뚱한 길로 가고 있더군요.


'이상하다 중간에 갈림길이 없었는데'


고민하다가 지나온 이정표까지 다시 10여 분 되돌아갔습니다.


거기서 다시 램블러를 키니 폰이 비에 젖어 제멋대로였지만 이정표에는 정확히 '용문산 1.0km'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정상인 '용문산 가섭봉'이라 씌었으면 확실할 텐데, 긴가민가하는 맘이 들더군요.

왔던 길 되돌아 이정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30분 추가 알바 한 셈이지요.



파이고 무너진 빗길


그런데 계속 의구심이 들더군요.


한참을 갔다고 생각했는데 길 생김새가 도무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같지 않고 심하게 내려가는 구간이 되풀이되었으니까요. 이상한 길로 잘못 들어 용문사나 상원사로 바로 내려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이구야, 여기를 다시 와서 인증해야 하는구나, 담에 올 땐 맑은 날 차 타고 최단코스로 올라와야 하나'


이런 걱정 하면서도, 일단 너무 힘들어 인증이고 뭐고 간에 정상은 포기하고 얼른 내려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접었지요.


맑은 날이라면 정상까지 두 시간 안짝이 걸릴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있다고분개하며 두 시간 정도 '씨카르 씨카르'하며 우중산행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갑자기 꿈에 그리던

'용문산 정상 110m'

라는 이정표가 떡하니 나타나더군요.



정상 이정표


놀랍고 반가움에 가파른 계단 단숨에 뛰어올라갑니다.


좁은 정상에는 아무도 없고 짙은 운무 속 희미한 정상석과 용문산 상징하는 노란 은행잎 구조물만이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여기 역시 사방은 짙은 흰색 장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후유, 다시 안 와도 되는구나~'


안도감에 얼른 인증합니다.



정상석과 은행잎


정상 아래 마련된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려 했으나 벌써 2시 30분,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어진 상태라 곧바로 하산 시작합니다.


4시 반에 버스를 타야 하니, 빗속 초행길을 2시간 만에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비에 젖은 암릉


결정은 옳았지만, 내려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비와 운무로 반질반질해진 날카로운 바위와 나무뿌리며 나무들은 발 디딜 곳 손잡을 곳 하나 쉬이 내어주지 않더군요.


정비가 잘 되지 않은 거의 자연 그대로의 등산로는 평소 같으면 스릴을 느끼며 오르내렸겠지만, 심신이 비에 젖은 이런 날에는 대단한 무리였습니다.



미끄러운 하산길


산객들의 용문산 후기가 떠오르더군요.


'욕문산'이니 '오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라는 험한 표현들이 십분 이해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1157m 고도에서 200m 평지까지 거의 1000m를 내려꼽야하는 험준한 심연의 계곡이 뾰족뾰족한 바위 너덜길로 형성 되어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더군다나 이정표가 있어야 할 곳에 '낙석주의 사고 주의' 경고문이 붙어있어, 길 찾기도 쉽지 않고 대신 위협감과 공포감까지 주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치곤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바위 너덜길


얼음이 녹지 않은 일부 구간은 빗물로 인해 한발 딛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끄러웠습니다.


아찔한 하산 길에 몸은 지쳐가는데,

끝을 알 수 없는 가야 할 길은 멀고

깊은 계곡에 어둠마저 내리더군요.


급한 마음에 진흙길에 빠져 한두 번 넘어지기도 했지만,

몸이 기억하는 숙달된 측방 후방낙법으로 다치진 않았어도 그때마다 다리에 힘이 쏙 빠지더군요.



얼음길과 마당바위


'후두두둑 후두두둑

쏴아아아 쏴아아아'


빗소리 계곡 물소리 어지럽게 들려옵니다.

평소라면 유유자적 풍경 즐기면서 걸었을 아름다운 심산유곡, 그래선 안 되지만 두려움으로 몰려왔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너덜길,

잠깐 나타나는 목재 다리가 지친 몸 달랠 수 있는 유일한 평지였습니다.



암릉을 흐르는 계곡


집결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에 전화 걸어 알바로 10분 정도 늦을 것 같은데 기다려 줄 수 있나 요청합니다.

안되면 전철로 귀가할 생각이었지요.

다행히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했으니 천천히 와도 된답니다.


드디어 끝이 없을 것 같던 너덜길이 주춤해지며 마의태자 전설 깃든 용문사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더군요.

용문사에서 시작된 포장도로를 뛰다시피 하여 버스에 도착하니 4시 50분, 간신히 시간 맞추었습니다.


집으로 간다는 안도감에 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힘들었지만 허벅지가 굵어지고 종아리가 딴딴해지고

마음마저 다져진 귀한 산행이었습니다.



용문사 은행나무


두려워마라

두려워마라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희망의 시간이 올 것이니


새로운 풍경은

잘못 들어선 길에서

만나게 되나니


두려운 만큼

단단해진 마음으로

또 살아갈 수 있을 터이니


놀리테 티메레



잊을 수 없는 그 길


*3월 14일 다녀왔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오후가 되자 바람 불고 날까지 찼습니다.

*유명산과 용문산 연계 산행으로 농다치고개~소구니산~유명산~활공장~배너미고개~용천스카이밸리 상단~용문산 가섭봉~마당바위~용문사 약 18km 알바 포함 8시간의 기억에 남을 혼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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