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나이 들어서
인트로2, 때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음을 탄하며
인생이 그렇다.
한 번 더 할 수 있고,
원하는 만큼 길거나
그도 아니면 계획대로만이라도 된다면,
희랍인 조르바의 카잔차키스처럼
‘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
두려운 것도 없다,
나는 자유인이다’를
외치며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련만.
근데 어쩌나,
삶이란 한 번뿐이며
짧고
그 또한 뜻한 바와는 거리가 있으니.
젊은 시절,
멋진 삶을 위해선
‘날카로운 지성,
풍부한 미소,
엄청난 주량’이 필수라며
학문과 일, 사람에 전념했다.
나이 들면서,
아름다운 삶은
인생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란 생각에
즐거움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공맹의 '군자삼락'보다는,
‘천하를 주유하고,
세상의 음식을 맛보며,
나이를 초월한 벗을 만나
인생의 유한함을 아쉬워하고,
술잔을 들어 하늘의 달을 담고,
아름다운 여인과 정을 나눈다’는
다소 이기적 즐거움인
'소인 오락(유람, 호식, 붕회, 거배, 탐미)'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어인 일일까?
이성의 자리를
점차 감성이 차지해가는 것이리라.
무엇인가를 하기에
나이는 큰 변수가 아니다.
단지 근력이 좀 딸릴 뿐이지.
‘명예롭게 살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겠다’ 던
나비부인의 나이는 열여섯,
‘백두산 돌을 칼을 갈아서,
두만강 물을 말을 먹여 없애겠다.’를
논하던 남이장군은 스물,
정난으로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37세,
세종께서는 49세에 한글을 반포하시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나이는 57세,
캔터키 치킨의 샌더스 할아버지가
KFC를 세운 때는 65세...,
더군다나 석가께서는 한 살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지 않는가?
영화 은교의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어진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는 말처럼
가는 시간을 어이하며
또 나이가 뭔 대수인가,
콘텐츠가 문제이지.
숀 코네리는 세월이 가도 참 멋있다.
영화이지만 그의 여유로움과 유머가 특히 그렇다.
그러나 나이가 상관없기로서니,
겨울이 오듯이
나이를 먹는 것과 아름다움은
다소 조화되기 힘들어 보인다.
나이를 먹으면 좋아지는 것도 많지만
의례 따라오는 쇠약함과
아집, 편협, 노회함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나이를 먹으려면
기본 조건인 건강과 경제력을 포함,
몇 가지는 준비되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때를 알고 행하는 능력.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기다릴 때를.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삶의 크래바스들을 더욱 진중히
대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둘째는 하루를 소중히 사는 태도.
지금, 여기 있는 것들에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느 날 바뀌어버린
밀려오는 무료한 시간들을,
그토록 소중했던 시간들로
돌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함께 할 사람들.
배우자는 물론 나이 불문
무엇이든 같이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것들,
빚진 것들을 다 되돌려 놓고 가야 함도.
그래서 인생은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