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서러운 법이다. 내가 첫째인적이 없어서, 첫째의 고충은 모른다.
어디선가 보고 흠뻑 눈물 젖은 말이 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미안해." 부모들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이번 삶이 처음이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50~60년대 태어났던 부모님들은 거칠고 힘든 시기를 살아온 만큼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하는 것이 힘드신 분들이다. 우리 집은 형과 나 그리고 친척형 셋이 같이 살았다. 어른들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살았던 엄마와 아빠는 큰 아빠의 첫째 아들을 결혼할 때까지 데리고 살았다. 내게는 형이 두 명이었지만, 엄마 아빠한테는 밥 먹여야 할 자식이 세 명이나 되었다.
아들 셋, 아니 아빠까지 넷을 데리고 산 엄마는 점점 강해졌다. 아니 강해져야만 했다. 모진 소리는 할 줄도 몰랐던 우리 엄마는 억척스러워졌다. 그래야지 자신의 새끼들이 밥을 굶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은 딸이 귀했다. 죄다 아들들 뿐이라서 그런지 우리 집안에 시집온 어른들은 다들 점점 강해지셨다. 늘 딸을 원했던 어른들이었기에 막내였던 나는 조금 부담이 되었다.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면 내 위로 있는 형들의 숫자는 8명이었다. 내 밑으로 하나 있는 막내는 몸이 아프다고 잘 오지 않았기에 모든 잔심부름은 다 나의 몫이었다. 어릴 적 나는 언제나 형들이 밀려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저것(?)들은 나와 얼마 나이 차이도 안 나면서(대부분은 8살 이상 차이가 났다.) 맨날 나를 부려먹었다. 어른들은 늘 내게 "네가 동생이니까 해야지!"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나는 그렇게 모든 잔심부름도 해야 했고, 모든 노동에도 따라가야 했다. 어리광을 부릴라 싶으면 "다 큰 놈이 무슨!"이란 말을 듣고 살았다. 나는 늘 그때마다 '다 큰 놈, 왜 맨날 애 취급하는가'하면서 복수(?)를 다짐하곤 했다.
사건은 조금 머리가 큰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나름 고학년이라고 불리면서 학교에서 어깨를 피고 다니던 시기였다. 우리 형과 나는 어릴 때 굉장히 성격이 맞지 않았지만 한 가지 닮은 것이라고는 누군가를 약 올릴 때는 대한민국 국가대표급이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도 늘 "동생인 네가 더 잘해야지." "동생인 네가 참아야지"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내가 안 했다고!"라고 대드는 날에는 이게 어디 어른한테 그러면서 매를 벌었다. 다른 집은 늘 "첫째인 네가 잘해야지!"라고 하는데 우리 집은 늘 반대이니 나는 늘 '다리 밑에서 주어온 애'가 바로 나인가 보다 생각했다.
매우 평범했던 일요일 아침, 밥을 먹다가 나는 상을 뒤집고 집을 뛰쳐나왔다. 차곡차곡 눈에 보이는 차별과 맨날 나무라는 서러움이 폭발한 나는 '또 나만 잘못했다는' 엄마의 구박에 밥상을 뒤집고 "다 필요 없어!"를 호기롭게 외치고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가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었다. 내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고, 쿨(Cool) 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요일 여름방학에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을 가출했다.
막상 집을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집 전화로 친구들이 집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놀러 다니던 90년대였지만, 아침 7시부터 친구들에게 놀자고 전화하고 찾아갈 수도 없었다. 집을 나온 지 10분도 안돼서 후회했지만,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나는 호기롭게 동네 산을 올랐다. 슬리퍼를 신고 1시간도 걸리지 않는 산에 올라 이리저리 걸었지만, 시간은 더~럽게 가지 않았다.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한 장이 전부였던 나는 산에 있는 정자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한참 자다가 으슬으슬한 한기에 눈을 뜬 나는 이쯤 되면 집에서 날 걱정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걸음을 올랐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담이 있었는데, 나는 자존심을 세우느라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담에 슬쩍 올라 집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한참을 훔쳐봐도 집은 평온했다. 마치 나 같은 것은 원래 없는 듯, 너무도 평온해서 나는 눈물을 훔치며 뛰었다. 역시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 세상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목적지도 없이 달렸다.
시간은 점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수중에 천 원뿐이었던 나는 학교 근처 슈퍼에 가서 과자를 사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슈퍼 아줌마가 왜 우냐고 물었고, 나는 "우리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것 같아요."라 대답하며 눈물 젖은 과자를 먹었다. 아줌마는 음료수를 하나 주면서 "집에 빨리 가라, 엄마 걱정하신다."라고 말했다. 나는 슈퍼 아줌마도 엄마의 내통 자라 생각하고 "안녕히 계세요."를 외치며 빠르게 멀어졌다. 여기서 엄마한테 잡히면 너무나 억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잡힌다면 '못 이기는 척' 집에 갈 수 있기도 했다.
무엇을 해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친했던 친구들은 시골에 간 친구들도 많았고, 엄마들끼리 미리 연락을 해서 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두 정거장 멀리 있던 친구 집까지 전화도 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갔지만 친구는 학원에 가고 없었다. 세상 외로움을 느끼며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배가 고파졌다. 다시 공원에 올라 공원 물을 마시면서 서러워서 또 한바탕 울었다. 세상은 나 혼자 뿐이라 생각하면서 "엄마~"하면서 울었다. 그러다가 나는 엄마가 밉다는 것을 깨닫고 "아빠~"하고 울었지만 영 맛이 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물로 채운 허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해가 져물었고, 갈 곳도 없어졌기에 나는 자존심을 굽히고 공중전화기에서 집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존심도 상했고, 분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지만 꾹 참고 아무말 하지 않았다. 형은 전화한 사람이 아무말 하지 않자 바로 나인 것을 알아챘다. "너 어디야? 배 안고파?"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엄마는?"이라고 물었다. 형은 "엄마가 빨리 와서 밥 먹으래"라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나는 소심해진 목소리로 "응"하고 끊고 집으로 걸어갔다.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티브이를 보면서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식탁에는 식은 밥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밥을 먹었고, 착하게 설거지를 다 한 후에 내 방으로 들어갔다. 집이 왜 이렇게 따뜻하고, 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앞으로 "돈 없으면 가출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오락실도 못 가고, 피시방도 못 가고 밥도 먹을 수 없다.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방황만 하던 내가 서러웠다. 돈이 많이 없었기에 내 가출이 초라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곧 죽어도 내가 잘못했다 하기는 싫어서 속으로 '다음에는 제대로 가출할 거야.'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날의 가출은 내게만 가출이었나 보다. 집안사람들한테는 그저 삐져서 뛰어나간 꼬마였다. 엄마는 며칠 후에 내게 "또 그러면 죽는다."라고 나지막이 말해주었다. 그때 그 식은 밥을 먹으면서 우리 엄마가 역시 친엄마였어하고 감동했는데,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분명 친엄마가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첫 가출 후 두 번째 가출은 1년인가 2년 뒤에 외갓집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