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관계는 계속 된다.
다들 자신의 인생이 험난했다고 말하지만, 나 역시 꽤나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 내 험난한 인생은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인간관계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이 많았다. 꽤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은 만나보았고 여기저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인간관계라는 것 중에서 굉장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날씨보다도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패턴화 되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 배신도 겪고, 실망도 하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무뎌져 갔다. 사람에게 정을 주는 것보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몸이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같은 크기의 그릇을 받는다. 각자의 그릇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누군가의 그릇은 자주 깨지나 크기가 커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작은 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그릇에 강철을 입혀서 깨지지 않게 만든다. 누군가는 그릇을 자꾸 키워나가면서 마음의 그릇을 키운다.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나는 그릇을 키운 편이라 생각이 든다. 담을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많고 깊어졌으며, 무뎌졌다. 어떤 스님이 한 말씀이 있다. "감정은 찻 잔 속에 든 물과 같아서, 찻 잔이 작으면 모래를 던져도 물이 넘친다. 찻잔이 바다와 같이 넓다면 돌덩어리를 던져도 고요하다." 나는 그 말이 와 닿아서 바다와 같은 고요함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찻 잔에 든 물이 많이 흔들릴 수록 삶이 자주 삐그덕거렸다.
그래서 예전에는 참 서운한 게 많았다. 서운하다. 사전적으로는 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이 있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서운한 감정은 이 이상이었다. 단지 한 줄로 정의하기에 서운하다는 감정은 내 상태에 크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부족한 설명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다. 이런 내게 혜민 스님의 정의가 꽤나 설득이 되었다.
서운하다는 말은 내가 마음속으로 상대에게 어떤 기대를 했는데, 상대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 기대를 저버리거나 무시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기대를 상대방이 알아서 충족시켜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서운한 감정은 상대가 내게 더 맞춰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알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다.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은 지나가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특히나 연인에게 서운한 감정을 자주 느끼게 된다. 나는 맞춰주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서 이해를 바라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가족과 연인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상황이어도 더욱더 큰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서운함이 잘못된 방향으로 번지면 집착이 된다. 모든 관계는 서로의 공간을 지키면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인데, 서운한 감정이 변질되면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한다. 내게 서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착과 소유욕은 상대의 불편을 가져오고 서로가 불안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상태로 빠지기 쉽다.
살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놓치게 된다. 나 역시 살면서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이별의 이유는 관계의 틀어짐이었지만, 관계의 틀어짐을 만드는 것은 서운한 감정의 시작부터였다. 상대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되면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나만을 바라보게 하고 싶은 소유욕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나와 다른 상대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좋은 사람일수록 가까이 두고 싶고, 나만 보고 싶고, 오래 보고 싶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켠에서는 나만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욕심도 생겼다.
여러번 다치고 치유하면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가끔 상대가 나를 서운하게 만들어도 내가 좋아하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해만 하고 넘어가면 상대는 이 정도는 괜찮은가 보다 하고 계속 날 서운하게 만들 것이고, 이해하지 않고 서운한 감정을 그때그때 다 말하면 관계가 복잡해졌다. 이를 조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감정들을 고민하면서 심리적으로 고통받을 때는 이런 게 다 무슨 소용 있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포기하고 싶은 감정들이 생겨났다.
마녀 사냥에서 가수 성시경 씨가 한 말 중 하나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초코파이뿐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서운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서운하다고 매번 말할 수도 없다. 서운한 것을 말하는 것이 괜히 쪼잔해 보이기도 하고 구질구질해 보일 때도 있다.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나는 자주 말하기보다는 조금 반복되면 말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정말 서운한 것이었으면 다음에 같은 일을 당할 때(?) 또 생각이 났고, 그저 이해하고 지나가는 정도였으면 시간이 지나도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이런 나도 여전히 서운한 감정이 생기고 가끔은 참고 있던 것을 나도 모르게 폭발시키기도 했지만, 극복하기 위해서 나름의 답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것이 하나 있다. 이건 오직 나만의 방식이었다. 내가 이런 방식을 가지고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동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만의 감정만을 생각하다가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이 정도 서운했던 것도 참아줬는데, 왜 너는 못 참아줘?
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상대는 내가 어떤 점을 참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리고 내가 상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참아준다고해서 상대도 참아줄 필요 역시 없는 법이었다. (사실 그래서 서운한 감정들이 더 커지는 법이다.) 결국, 감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답도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물론 우리가 답을 알고 있다고 해도, 오답을 찍고 싶게 만드는 것이 감정이라는 녀석이기 때문에 무엇하나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백한다. 내가 널 가끔 서운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내 행동들이, 널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수 있고 그로 인해서 네가 서운해질 수도 있다. 가끔 내가 만드는 서운함을 내가 알아주기를 원할 때도 있고,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네가 나한테 서운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면 좋겠다.
어떤 어떤 점이 서운했다. 다음부터는 조금만 신경 써주라.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 부분이 이해가 안돼서 반박할 수 있지만 그건 그때 잠깐일 뿐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맞는 관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칼럼니스트 곽정은의 말을 믿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은 우리가 부딪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맞는 관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의 다른 말은 "서로 잘 맞춰가면 모든 것이 다 맞는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종 다투기도 하고 서로를 서운하게도 만들어야 한다. 서운한 감정이 든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쪼잔한(?) 증명 중 하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