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여자친구를 추적해라.
원래 해당 매거진에는 평범한 어른의 연애라는 주제로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소설을 쓰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이 올라온 지 꽤 되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지속하지 못하고 있네요. 오늘은 우연히 2010년에 썼던 글을 발견해서 한 번 올려보았습니다. 해당 매거진에 대한 내용이 아니지만,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용은 A4로 8장 정도인데, 끊어 올릴까 하다가 그냥 한 번에 쭉 올리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쓴 것이라 조금 유치하지만 감안해주세요. 그 시절 유명했던 싸이월드도 중간에 나온답니다. :)
“하아......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 거야?”
뒤따라 뛰어오는 엄마와 거리를 두고 푸념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내 나이 24살, 군대도 무사히 전역했고 학교도 복학하여 잘 다니고 성적도 나쁘지 않게 받지만 우리 엄마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아들, 넌 아직 공부해야 하니까 여자 친구는 만들지 마. 알았지? 그리고 네 형, 아직도 여자 한번 못 사귀어 본 모양인데 주위에 이쁜 친구들 소개팅도 좀 시켜주고 너보다 네 형이 걱정이다 걱정이야......”
오랜만에 엄마랑 같이 중랑천을 따라 조깅을 했건만, 우리 엄마는 또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이런 싸움에는 그냥 말없이 “알았어” 하고 엄마의 말을 끊어 버리는 것이 편하다. 괜히 말 꼬랑지가 붙었다간 엄마도 나도 귀찮아진다. 그렇다고 엄마의 말을 잘 듣냐고? 그건 또 말이 달라지지, 내 잔머리는 엄마를 닮아서 복학하자마자 여자 친구를 만들었다. 물론, 엄마에겐 비밀이다. 여자 친구도 있고, 학점도 4.0이면 나쁘지 않지만 우리 엄마가 알면 작은 것 하나에도 여자 친구 때문이라고 꼬투리를 잡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집에선 여자 친구와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 때문에 여자 친구가 많이 싫어하긴 하지만 눈치 빠른 우리 엄마를 속이기 위해선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후.. 후... 아들은 젊어서 빠르고 좋구나, 후... 엄마랑 같이 왔으면 엄마랑 같이 뛰어야지 치사하게 먼저 가니? 이래서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까”
어느새 뒤따라온 엄마는 숨을 몰아쉬면서 통하지도 않는 투정 어린 푸념을 늘어놓는다. 으, 또 시작이다.
“그나저나, 형은 아직도 만나는 사람이 없대?”
또 시시콜콜한 대화로 귀찮아지기 전에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돌려놓았다. 조금 목소리를 상기시켜줘야 엄마가 신나서 이야기를 하겠지, 후후후 엄마 난 이제 예전의 아들이 아니에요, 내 잔머리는 엄마라는 스승을 뛰어나 이미 청출어람의 단계랍니다.
시시콜콜한 내용으로 엄마와 신나게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집 근처에 도착했다. 오늘 운동은 땀도 못 빼고 살도 못 빼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쨌든 아들, 동생이니 형에게 이것저것 좀 물어보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으면 엄마한테도 슬쩍 이야기해주고 응? 그게 형제의 맛이고 작은아들과 엄마의 소통인 거야, 첩보전을 잘하면 용. 돈. 도 올라가고 좋지 않겠어?”
집으로 올라가기 전 엄마의 달콤한 유혹이 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특히, 용돈 부분을 강조하는데 너무 매력적이지만 한번 튕겨줘야 한다.
“뭐 형이 나한테 그런 거 말하고 그랬나? 암튼 알았어, 알게 되면 말해줄게”
퉁명스럽게 뱉긴 했지만, 나 역시 형의 연애사가 궁금하긴 하다. 덤으로 용돈도 들어오면 나야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우리 형은 나와 두 살 차이가 난다. 그러나 우리 형과 나는 대화가 많이 없다. 어릴 때부터 많이 싸운 것도 있고, 형은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서 소극적이고 소처럼 무뚝뚝하다. 이런 사람이 연애라, 하... 앞길이 구만리다. 아니 구만리로 되겠어? 형 모르게 항상 형의 정보를 얻어냈지만, 형의 연애경력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연애도 안 하고 친구도 잘 안 만나고 회사만 다니다 보니 형은 돈이 많다. 그래서 오늘 아침 현금이 하나도 없던 나는 형의 지갑을 몰래 열었다. 휴가라고 늦잠 자는 형에게 속삭이듯
“형 돈 좀 빌려갈게~”
라고 말하고 아침 빵 값을 하려고 형의 지갑을 연 순간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원래 눈치가 빨라서 남들과 다른 육감이라는 것이 발달되어있는 나에게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목적은 형의 지갑에서 1000원만 빌려가는 거였지만, 어느새 내 손은 형의 지갑을 검색하고 있었다.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바이러스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듯이 나의 이질감을 찾아내기 위해 내 손은 재빨리 형의 지갑을 탐색했다. 사진이나 명함은 이상이 없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수증 내역을 확인하는 순간, 캬~! 역시나 나의 감각은 죽지 않았구나 하는 감동과 도대체 누구에게 이. 런. 걸 사줬을까 하는 의구심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첫 번째 물증을 잡았으니 이제 바로 핸드폰 검색을 시작해야 한다. 내게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형의 아이폰을 들고 잠가놓은 비밀번호도 가뿐히 풀고, (형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같은 것은 알고 있어야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메시지 목록부터 확인을 했다. ‘아~ 역시, 형은 내 손바닥 안이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형의 지갑에서 여유롭게 1000원 더 얹어서 2000원을 꺼내고 집을 나섰다. ‘형님 용돈 잘 쓸게요, 잘 자요.’ 물론, 대문을 나오면서 형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예절을 잊지는 않았다.
“진짜? 그게 사실이면 축하해야 하잖아?”
학교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던 지수의 입에서 의구심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공유하고 같이 작전을 세울 사람은 내 여자 친구 지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작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제시했다.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그냥 형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니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거 있어?”
별거 아니라듯이 말하고 그녀는 빨리 공부나 하자고 책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아니 어떻게 그렇게 간단해? 이 재미있는 것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라고?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도 않잖아?”
손은 가볍게 책을 옆으로 밀고, 내 입에선 흥분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재미있는 사건을 어찌 이리 쉽게 끝내라는 거냐? 어릴 때부터 읽었던 코난과 김전일 만화책의 지식을 이제야 써먹을 수 있게 됐는데 바로 엄마에게 말하고, 형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완벽한 비밀을 엄수하고 현장 포착하는 순간까지 가족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그 정도면 확실하잖아? 영수증 내역도 확인했고, 문자 내용도 확인했다며? 뭐가 더 필요해? 그리고 너 내일 시험인 거 잊었어? 지금 그런 의미 없는 행동에 시간을 쓰기보다는 책 한 장 더 읽는 게 어때?”
“의미가 없다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날카로운 그녀의 눈을 본 순간 펜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형의 연애사는 나중에 확인할 수 있지만 시험은 당장 내일이니 시험공부가 맞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시선을 책으로 가져갔다. 첫 장을 보고 있을 때 지수의 승리를 자축하는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내일은 시험이란 생각이 갑자기 바오밥나무처럼 거대해져서 차마 대꾸할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 내일은 시험이니까......
시험이 끝나고 지수와 데이트를 하다가 밤 11시에 집에 들어갔다. 무언가 익숙치 않은 집 풍경을 잘 살펴보니 형이 보이지가 않는다.
“엄마, 나왔어~ 근데, 형 어디 갔어?”
신발을 벗으면서 한 일상적인 질문에 TV를 보며 한참 운동을 하던 엄마는
“오늘 친구들이랑 찜질방 간데, 내일 아침에 바로 거기서 회사 간다더라, 밥 먹었니? 냉장고에 떡 있으니 배고프면 먹어”
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형이 외박을? 오, 이건 정말 심각하다. 26년 살면서 형은 수련회, 학교 MT를 제외하고는 절대 외박을 하지 않았다. 어디를 직접 나서서 간 적도 없고, 방학에도 여행 같은 것은 가지도 않는 그 형이 외박이라고? 이건 정말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엄마는 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걸까?
내가 외박한다고 하면 “ 뭐? 외박? 시끄럽고 빨리 들어와, 밤에는 여우가 늑대보다 강해, 그니까 좋은 말 할 때 어서 들어와!”라고 했을 텐데, 형이 외박한다니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다니. 이거 내 이미지가 왜 이러지... 가 아니라, 엄마는 이 중요한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눈치 100단이라는 엄마도 이제 늙었구나... 방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옷을 갈아입고 재빨리 형의 미니홈피로 들어갔다. 물론, 형의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방명록을 확인했다. 미니홈피 관리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티라도 내듯이, 형의 메인사진은 4년째 그대로이다. 일촌 수도 몇 명 없고, 게시물도 손에 꼽힐 정도다. 어떤 정보를 얻을 생각으로 오진 않았지만, 작은 증거라도 있다면 어떤 여자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본 형의 비밀방명록은 내게 회심의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형은 미술고등학교에 디자인학과를 나왔다. 거기다 중학교도 남녀공학을 다녔다. 그러니까 형은 중학교 때 보다 고등학교 때 주위에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고, 대학교 때는 고등학교 때보다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은 곳에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형은 여자 친구들보다 소수의 남자 친구들과 어울렸고 친하게 지내는 여자 친구들도 몇 명 되지도 않았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들일뿐이다.
형과 다르게 나는 남중을 나오고 또 남고를 나왔으며 대학교도 남자들 천지인 기계공학과를 다니고 있다. 형은 나와 다르게 정말 남자들이 가장 바라는 성장기를 지나왔어도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키도 180이 넘는데 형은 그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를 여자 친구로 선택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사슴의 무리에서 사냥을 하지 않는 호랑이와도 같은 것이요, 사료가 바닥에 널려있는데도 먹지 않는 돼지와도 같은 것이다. 즉, 상식적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발생됐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를 찍어서 전문가들과 같이 분석을 하고 싶을 정도다. 여자에 관심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스터베이션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형이 어설프게 숨겨놓은 영상물을 수차례 본 적도 있으니 그것에 대한 걱정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도저히 형의 심리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만에 들어간 형의 미니홈피 방명록을 본 순간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상대방 미니홈피는 닫혀있기에 다른 정보를 확인할 수 없겠지만 내 감각이 말을 하고 있다.
‘이건 대물이야. 넌 지금 최상급 물고기를 낚아 올린 것과 마찬가지야. 이제 네가 할 일은 회를 뜨고 탕을 끓이고 소주 한잔 하면서 승리를 자축하는 일만 남았어.’
다음날 아침에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혹시나 하는 맘에 형의 방을 열어봤지만 역시나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의 방은 파도가 치기 전의 바다처럼 잔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강풍과 높은 파도를 동반한 태풍이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바다에서 평생을 산 사람도 바다를 읽지 못한다. 나는 바다를 이제 어느 정도 알아! 하면서 자만하는 선장은 결국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그렇기에 나 역시 바다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조만간 이 방의 조용한 물결에 큰 파도가 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대풍의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외박을 했어?”
지수가 놀란 목소리로 마시려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외쳤다. 이젠 지수도 조금 많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나 보다. 우리 형의 습성을 수차례 말을 해줬었기에 형의 외박 소식은 그 좋아하는 갓 내린 아메리카노의 맛을 뒤로 밀어버릴 정도로 큰 사건인 것이다. 봐봐 내가 대박 사건이라고 이야기했었지? 훗
“그래! 이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야! 말이 돼? 이게? ‘얼룩말이 사실은 육식동물이었다.’라는 발표가 난다고 하더라도 이 일보다 클 수는 없다고 생각해!”
조금 오버했나? 싶을 정도로 내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20년 넘게 자기 의지로는 외박을 안 한 사람이다. 이건 분명 뭔가 있다는 게 확실하다.
“야, 대박이다 정말. 정말 정말 너의 형 여자 친구 생겼나 보다? 그래 26년 살면서 아직 연애도 한 번도 안 해본 게 말이나 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야지”
혼자 뭘 그렇게 알겠는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지수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나를 보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왜 나한테 어제 알았다는 대박 정보 말 안 해줘? 응? 응?”
아! 맞다. 아직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구나. 사실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든 정보를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이쯤에서 내가 모은 몇 가지 정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처음 정보를 얻게 된 형의 지갑 안에는 조금 독특한 것이 있었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형인데 텀블러를 계산한 영수증이 있는 것이다. 텀블러? 형이 쓸 목적으로 샀다면 집에도 충분히 예쁜 텀블러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카페에서 주말 알바를 하면서 매장에서 하나씩 들고 와서 집에는 쓰지 않는 여러 텀블러가 굴러다닌다. 자기돈 쓰기 아까워하고, 남이 잃어버리거나 버린 거 잘 주어와서 쓰는 자린고비 형이 텀블러를 샀다고? 말도 안 된다.
내가 아는 형이라면 말없이 집에 있는 텀블러를 가져다 쓰고, 나중에 내가 “어 왜 내 것 쓰는 거야? 말도 없이?”라고 따지면 그제야, “어차피 너 안쓰니까 좀 쓰는 건데 왜 시비야? 너 지금 쓰는 것도 아니잖아? 남자가 치사하게 굴기는” 식으로 대화가 오갈 것이다.
그런 형이 텀블러의 영수증이 있다. 거기다 색깔을 본 순간, 이건 절대 형의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색깔이냐고? 절대 남자라면 쓰지 않을 색이지, 당당하게 그 색의 텀블러를 쓰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 슬슬 감이 오지 않는가? 지금도 감이 안 온다면 자신의 센스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무슨 색이냐고? 핑. 크. 색이다. 핑. 크. 어느 남자가 핑크색 텀블러를 살까? 여성성이라고는 부족한 형이 핑크색 텀블러를 사서 쓸 일은 없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확인한 형의 핸드폰 문자메시지는 나의 추측을 확실하게 만들어주었다. ♡로 저장된 번호와, [텀블러 잘 쓸게요]라는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본 순간 게임은 끝이 났다. 버저비터의 희열찬 역전승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뭐랄까,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가 5-0으로 끝날 때의 프랑스팀의 기분이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말 안 해줄 거야? 정말?”
지수의 목소리에 상념의 나락에 빠져있던 정신이 문득 돌아왔다. 아차차, 이러다 지수 삐지겠네
“아니지 말해줘야지, 우리 지수님 삐졌어요?”
간만의 애교는 가볍게 무시당하고 돌아오는 말은 냉랭한 반응밖에 없었다.
“됐고, 빨리 얘기해”
차가운 그녀의 반응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기가 죽은 승냥이처럼 지수에게 어제 본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어제 형의 미니홈피에 들어가서 방명록을 봤는데, 어떤 여자가 [보고싶...♡] 이렇게 글을 남긴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여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그 여자 홈페이진 닫혀있어서 아무런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지만, 뭐 100% 아닙니까?”
마치, 스파이로서 상대편의 정보를 빼내 오고 상관의 칭찬을 기다리듯이 그녀의 칭찬의 말 한마디를 기다렸지만, 역시 세상에 쉬운 것은 없다.
“그게 대박이야? 정말 실망했어. 그걸로 어떻게 알아?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끼리 그런 말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원했던 칭찬의 말은 아니었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 수명이 다 됐다고 생각했던 전구가 반짝 빛을 내면서 내 정신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그래 바로 그거야! 사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카메라 앨범을 아직 확인 안 했어! 오늘 당장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고마워 지수야~ 역시 넌 내 귀염둥이야!”
내가 지수의 볼을 귀엽게 좌우로 흔들며 좋아하니, 처음에 지수는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짓다가 내가 좋아하니 같이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아이고 귀염둥이 이 오빠가 많이 예뻐해 줄게요 하하하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가니 형이 퇴근을 하고 바로 집에 와 있었다. 언제나 같은 뒷모습을 보이며 컴퓨터를 하고 있는 형의 모습을 보니 내 의심이 잘못된 건가?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여자가 생겼다면 지금 이 시간에 집에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궁금한 것을 먼저 티 내면 상대방과의 거래에서 밑지고 들어가기에 일상적인 질문부터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이야, 어제 무슨 바람이 불어 외박을 하셨어?”
형의 방문에 기대어 말을 걸었지만, 형은 그저 고개만 까딱거리며 내 인사를 받아쳤다. 이렇게 무정하고 불성실할 수 있나? 이러니 여자 친구가 여태까지 없었던 거야! 스글스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불만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응? 어쩐 일로 외박을 하셨습니까?”
“아, 귀찮게, 친구랑 놀았다 왜?”
간단한 질문에도 이리 까칠하게 나오시니 제가 어찌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이게 그렇게 화가 날 질문도 아니고 너무하네요 정말. 대화를 연장하지 못하게 끊어버리는 저 기술에 할 말이 막혀버렸다.
“아니, 뭐 궁금해서 궁금해하면 안 돼?”
“어”
뒤도 안 돌아보고 말하는 형의 모습에 의욕이 팍 줄었다. 이거 텀블러녀와 트러블이 생긴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형, 혹시 여자 생겼어?”
나도 모르게 포수에게 직구 송구를 해버리고 말았다. 이건 감독이 지시한 사인과 너무나 다르잖아. 변화구와 포크볼을 잘 섞어서 던지라고 했던 초반 작전은 어디로 갔니? 허, 참....
“아니”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나의 직구는 타자의 큰 스윙에 제대로 맞아 저 멀리 펜스를 넘어서 아직도 날아가고 있다. 이렇게 물어보면 그 누가, 그것도 저 무뚝뚝한 형이 “어, 나 여자 생겼어”라고 말하겠니? 왜 이렇게 무식해졌니? 하지만, 괜찮아! 아직 타자는 뛰지 않았다. 타자가 뛰기 전에 다시 한번 찔러봐야지
“형, 그럼 소개팅 하나 할래? 내 아는 사람 많아, 예쁜 애들도 많이 알고, 어때?”
폭투이긴 하지만 타자가 멍청하다면 분명 스트라이크를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너보다 예쁜 애들 더 많이 알거든? 귀찮게 하지 말고 좀 가라”
아~ 공이 날아간다. 저 멀리, 또다시 펜스를 넘겨서 홈런이구나. 패전투수가 되어 마운드를 내려가는 기분으로 나는 내방으로 돌아갔다. 저런 성격의 형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런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이 뭐가 좋다고 만나는 여자가 있을까? 취향이 참 독특하구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방에서 책을 읽는 척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허나, 예술을 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한번 엉덩이를 붙이고 그 엉덩이를 다시 떼는 데는 정말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슬슬 책 때문에 졸리고, 기다리느라 지쳐갈 때쯤 기회가 왔다. 형이 큰 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간 것이다. 그 사이 재빨리 형의 방에 가서 형의 핸드폰을 뒤졌다. 주어진 시간은 3분에서 5분 남짓. 긴박한 마음에 손이 떨렸지만 정해진 순서대로 먼저 카메라 앨범으로 들어갔다. 사진이 많이 있지만 죄다 남자 친구들과 찍은 사직밖에 없었다. 뭐지? 아직 서로 사진을 찍고 그런 사이가 아닌가? 밀려오는 실망감을 잠시 뒤로 미루고 다음 단계인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로 저장되어있는 전화번호. 그리고 바로 방금까지 대화한 쪽지 내용.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단서의 포착. 커다란 획득을 하고 핸드폰을 원래 있던 위치에 내려 두고 난 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내 방에 돌아가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몇 분후 형이 화장실에서 나왔고 방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다시 컴퓨터를 하기 시작했다. 잠깐 긴장했던 마음을 접고 난 후, 내일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 머리는 재빨리 회전하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 내일이면 끝나는 거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내 머릿속은 벌써부터 엄마가 용돈을 얼마나 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형 고마워♡
다음날 강의가 끝나자마자 지수를 만나지 않고 바로 학교를 나왔다. 지수에겐 미리 말을 해놓은 상태고, 문자로 계속해서 상황을 생중계해주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형의 약속 장소에서 매복을 할 것이다. 형이 이태원에서 노는지 잘 몰랐지만, 이태원은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동네이기에 이태원의 지리는 남들보단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과 텀블러녀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처음 들어보는 카페였다. 인터넷을 찾아서야 위치를 확인했지만, 그래도 도저히 위치가 감에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카페야?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보나 마나 지수가 뻔하다.
[나 이제 수업 끝났어 ㅠㅠ 어디야? 가고 있어?]
[응, 7시 만난다고 했으니 20~30분 여유가 있어. 나 떨려 ㅋㅋ]
아무리 소개팅을 했어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나 지금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왠지 모를 긴장감과 스릴감이 몸을 엄습했다. 와, 이런 기분 처음이야 정말. 번지점프를 해보진 않았지만, 왠지 번지점프를 한다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다.
[오늘 복장은 어때? 잠복수사에 어울리게 입었어?]
지수가 많이 궁금했는지 답장을 보내자마자 바로 답이 왔다. 떨리던 감정을 잠시 뒤로하고 내 복장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나는 캡 모자로 얼굴을 푹 눌러썼으며, 커다란 후드티를 입고 후드모자까지 뒤집어쓴 상태이다. 신발과 바지도 친구에게 빌렸기에 다른 사람이 봐도 쉽게 나란 걸 눈치 채지 못하는 상황이다. 물론 목도리도 해서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센스는 있지 않았다. 정말, 지금 계절이 늦가을이라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여름이라면 이런 복장은 생각도 못했을 거다. 아니, 잠복수사 같은 것은 실천에 옮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수와의 문자를 뒤로하고 이태원에 내려서 인터넷에서 본 길대로 이 길 저 길로 들어갔다. 미로처럼 꼬인 골목길에 꽤 많은 카페와 옷가게가 있었음에 놀랐고, 형이 이런 곳을 안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다. 형과 텀블러녀가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 도착했을 때 카페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 매우 비밀스러운 카페라고 할까나? 분위기가 되게 어둑하고 카페 안은 주황 전등으로 아늑한 느낌을 디자인을 했지만, bar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카페 안에 들어가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다른 테이블의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카페였다. 다른 테이블에선 마치 외국영화에 나오는 비밀거래가 이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카페에 들어가서 문이 잘 보이면서 카페 내부가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직 저녁식사 시간이라서 사람들이 카페에 많이 있지 않았다. 아니면 원래 손님이 적은 카페일 수도 있겠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고 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카페 입성. 가장 좋은 자리로 잡았어. 근데 이 카페 조금 음침해ㅠ]
지수도 지금 상황이 궁금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벌써 자리까지 잡았어? 어떻기에 음침하다는 거야? 형은 왔어?]
지수의 문자를 보고, 이렇게 궁금해하면 같이 데려올 걸 그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조금 미안해졌다. 나만 이런 재밌고 스릴 있는 경험을 한다고 삐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미안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 형은 아직....]
애써 미안한 마음을 감추고 문자를 하려는 순간 형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마시며 형의 눈을 피했다. 형은 카페를 한번 훑어보더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매너를 보이는 건가? 저 형이? 오 정말 말도 안 돼. 나는 재빨리 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방금 왔어, 날 몰라본 것 같아. 나 정말 긴장됨]
[아 대박!!!!!! 상대편은?!! 나도 떨려 와!! 궁금하니까 빨리 문자 해줄래?]
[죄송합니다ㅋㅋ. 지금 계속 형 쪽을 몰래 주시하고 있음. 7시다]
카페에 있던 커다란 시계가 7시란 것을 알리듯 종을 7번 쳤다. 이 카페는 이상하다. 뭔가 다른 세상의 카페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갑자기 저기 앉아있는 저 남자가 형이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칼은 뽑혔고, 전쟁에 나온 이상, 승리 아니면 패전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상대방이 안 와. 어 누가 들어왔어!]
라며 재빨리 문자를 보내고 입구에 들어온 사람을 봤다. 카페 내에 손님이 많이 없고, 다른 손님이 자주 들리는 것이 아니라서 입구가 열리는 일은 매우 적었다. 아까 형이 들어오고 난 후로 첫 번째 손님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기대와 다르게 들어온 사람은 남자였다. 매우 마른 체구에 전등 아래를 지나갈 때 얼굴을 봤는데, 여자들에게 인기 많게 생겼다고 느낄 정도로 잘생겼다. 그렇다고 남성적인 이미지가 아니고 매우 여성적으로 잘생긴 남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형이 기다리던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설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 순간 진동이 오면서 문자가 왔지만 핸드폰을 볼 용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서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재빨리 일어서려고 한 순간, 그 남자와 형이 입을 맞추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참지 못했는지 전화를 하나보다. 내 손에선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 핸드폰에 진동이 오기 시작했다. 난 언제쯤 이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어느덧 다섯 번째 진동이 오기 시작했다. 그냥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 형수님이 남자면 나는 형수한테 형님이라 해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