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계>를 보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들 이미 보셨겠지만
남자의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몇 개가 존재한다. 남자의 영화란 보통 권력과 야망, 그리고 우정에 대한 감정들을 컨트롤하면서 진중한 느낌을 주는 영화들을 말한다.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이런 류의 영화에 끌린다. 남자들끼리의 우정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진한 감동을 받는다.
영화 <신세계>는 내게 영화 <배트맨 다크나이트> 이후의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신세계>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은 이전에 <부당 거래>와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를 썼다. 비정한 사회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던 박훈정 감독은 끝판왕의 느낌으로 영화 <신세계>를 만들었다. 가장 먼저 캐스팅된 배우는 강 과장 역의 '최민식'이었고, 최민식 씨는 시나리오를 보고 이자성 역할로 배우 이정재를 추천했다. 박훈정 감독은 정청 역으로 오직 배우 황정민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최민식 씨와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촬영했고 황정민 씨와는 영화 <부당거래>를 촬영했기에 아마도 이 둘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강 과장이 순경인 이자성에게 "너 나랑 일하나 같이 하자"라는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진짜로 이자성 역할을 캐스팅할 때도 최민식 씨가 이정재 씨에게 전화해서 "너 나랑 작품 하나같이 하자"라고 했다고 한다. 이정재 씨는 연락을 받자마자 다른 작품을 고사하고 참여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본인들만 알고 있지 않을까?
파울로 코엘료의 책 '흐르는 강물처럼'의 에피소드 중 악마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한 꼬마가 악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데, 악마가 그 꼬마한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었구나"라는 이야기를 한다. 무언가를 실제로 마주하기 전에 선과 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숨어있다. 영화 <신세계>도 이와 같다. 영화를 보면 오히려 경찰이 더 악마처럼 보인다. 오히려 골드문에 소속된 이들이 경찰에 좌지우지되는 체스 말처럼 느껴진다. 물론 골드문의 깡패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에 이르게 했겠지만, 영화에서 경찰의 꼼수(?)에 칼춤을 추면서 생기는 피해자들의 결말이 참으로 안타까울 수 없다.
영화를 보면 자꾸 생각하게 된다. 과연 선(善)은 항상 옳은 것일까? 무자비한 정청은 경찰인 동생 이자성을 끝까지 감싸준다. 단순히 조직의 동생이 아닌 가족과 같은 기분으로 챙긴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경찰인 강 과장은 단순히 이자성을 도구로 이용한다. 악을 통제하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 악(惡)의 편이 되지만 과연 그의 당위성이 정당 할까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아마 강 과장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일이 끝나고 사표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의 시작에 정청은 이자성에게 가짜 시계를 선물한다. 돈도 많은 정청이 왜 굳이 가짜 시계를 사줬을까? 영화의 주인공은 이자성이고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이자성을 의미한다. 경찰이면서 깡패 조식 골드문의 이사인 이자성이 바로 가짜 시계이다. 정품 인척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정품이 되지 못한다. 이자성이 바둑 선생인 송지효에게 분을 풀어놓는 장면이 있다.
"나도 경찰이야, 같은 편이라고!"
같은 편이고 싶지만 이자성 스스로는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세상에 속해야 하는지, 과연 자신이 경찰인지 깡패인지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끊임없이 자문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이자성의 양복이 회색에서 점점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보게 되면 느끼게 된다.) 이는 이자성이 경찰과 깡패라는 회색지대에 존재하다가 점점 한 곳으로 마음을 옮기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짜였던 인생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통해서 진짜가 되는 것을 뜻한다.
신세계에 대한 사전 정의를 찾아보면 새롭게 생활하거나 활동하는 장소. 또는 새로운 경치라고 나온다. 골드문의 회장 자리를 경찰의 입맛에 맞게 만드는 이 프로젝트가 왜 '신세계'였을까? 경찰이 새롭게 활동하는 장소였을까? 아니면 경찰에 조종당하는 골드문의 새로운 경치였을까? 경찰의 시나리오대로 영화가 흘러갔다면 이는 아마도 경찰의 신세계가 되었을 것이다. 최대 깡패 조직인 골드문을 경찰이 통제한다면, 악을 통제하는 선이 생기는 것이고 이는 경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주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세계는 흑백 세상에 살던 이자성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하던 이자성에게 새롭게 활동하는 장소와 경치가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자성에게 그 세계는 신세계였을까? 끊임없이 괴로워하던 이자성은 과연 새로운 위치에서 행복했을까? 경찰이라는 정의감에 시작된 언더커버 활동에서 한 조직의 회장이 된 그가 보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과연 그가 회장인 골드문은 어떤 모습일까? 악의 이름을 쓴 선일까? 한 때 선을 품었던 악일까?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보면, 담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에서 나오는 담배는 권력을 뜻한다고 한다. 강 과장은 영화 초반에 담배를 피우면서 골드문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 행동한다. 하지만, 강 과장은 영화 후반에 가면 담배를 끊게 된다. 더 이상 권력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싶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정청과 이중구는 끊임없이 담배를 피운다. 골드문의 회장 자리를 두고 정청은 속을 비치지 않고, 이중구는 속을 내비친다. 이들의 담배는 정말 권력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 둘의 마지막도 대비가 된다. 정청은 마지막에 담배를 피우면서 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정말 아꼈던 이자성을 위해서 권력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중구는 끝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세상을 떠난다. 유명한 대사인 "거 담배 있으면 하나만 줘라, 갈 땐 가더라도 담배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를 남기며 잊지 못할 인상을 주었던 이중구, 그는 마지막까지 권력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한다. 오죽하면 "자성이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줘라"라고 말하겠는가.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배우 박성웅 씨가 연속해서 15개의 담배를 폈다고 하는데, 이는 배역에 대한 욕심이었을까? 헌신이었을까?
그리고 마지막 이자성은 영화 내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었을 뿐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 권력에 욕심이 없던 이자성, 오직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느 한쪽에 온전하게 소속되는 것이었다. 마지막 회장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자성은 권력의 정점에 오른 승자의 세리머니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신세계>는 남자들의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 안에는 권력에 대한 욕망, 남자들의 의리, 그리고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잘 버무려져 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흑과 백을 대조되면서 보여준다. 우리가 말하는 흑과 백은 늘 나쁜 놈과 착한 놈이다. 하지만 바둑판에서 흑과 백은 그저 상대와 상대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흑과 백은 선과 악 일지 모르지만,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흑과 백은 단순한 구분일 뿐이다. 어떤 해석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흑은 내편이 되기도 하고 상대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항상 인지해야만 한다. 이전에 살던 것과는 새로운 경치를 말해주는 신세계,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신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거, 아직도 담배피기 좋은 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