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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콘 Feb 16. 2019

영국의 경제를 붕괴시킬뻔했던 베른하르트 작전

영화 <카운터 페이터>를 보고

전쟁에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병사 vs 병사의 승부로 싸우는 것만이 전쟁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전쟁은 현실적으로 병사 vs 병사로 싸우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여러 수 싸움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전쟁에서 단순히 병사로만 싸우는 장군은 3류다. 진정 유능한 장수는 싸우지 않고 적을 무너트린다. 그러기 위해서 수많은 지략가가 필요한 법이다. 삼국지를 보면 많은 공을 세운 장수들만 유명하지 않다. 어떤 측면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전략을 사용한 지략가들이 더 유명하기도 하다. 결국 전쟁은 이면에 보이는 병사들의 싸움 외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대를 무너트릴 전략을 짜느라 바쁘다.


영화 <카운터 페이터>는 2차 세계 대전 때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독일이 영국과 미국 경제를 무너트려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포로로 잡았던 유대인들을 통해서 위조지폐를 만들게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독일에서 위조 전문가로 활동하던 살로몬 소로비치와 인쇄기술을 가진 브루거는 모두 실존 인물이다. 소위 베른하르트 작전이라고 불렸던 위조지폐 작업에 투입된 소로비치는 독일군에게 잡히기 전까지 무엇이든 위조하면서 온갖 부를 누리고 살았다. 독일군에 잡혀서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소로비치는 어느 날 19 구역으로 불렸던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베를린 근교의 19구역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영국 경제를 무너트리고자 했던 독일군이 위조지폐를 만들던 곳이었다. 1939년 9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2주 후, 독일의 재무성은 영국 경제를 파괴하기 위해서 대량의 위조지폐를 만들어 영국 상공에 투하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재무성의 계획은 SS장관 히믈러의 정치적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계획을 좌절시켰던 SS친위대는 1942년 위조지폐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작전의 책임자로는 친위대 중령 베른하르트 크루거가 임명되었고, 작전은 중령의 이름을 따 베른하르트 작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른하르트 작전에 투입된 30여 명의 인쇄공, 회계사, 사진작가 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의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들은 고된 육체적 노동과 죽음을 피하는 대신 위조지폐를 만들면서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이들에겐 개인 침대와 세안대 하물며 담배까지 제공되면서,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 중에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1944년 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다가 19 구역으로 차출된 아브라함 하르코프스키는 "냄비에 우유와 설탕이 들어간 오트밀이 끓고 있었다. 내가 수용소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좋은 대우를 받은 이들은 행복했을까? 아니었다. 이들은 언젠가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위조지폐를 만드는 것이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폭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굴하게라도 살 것인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가질 것인가.


전쟁시대에서 죽음은 속된 말로 '개죽음'과 다름없다. 국가를 위해서라는 숭고한 죽음은 성공적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19 구역에서 위조지폐를 만드는 유대인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지폐를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매일 양심과 싸우고 있었다. 반대편 벽 넘어에선 자신들과 같은 유대인들이 고통으로 시달렸지만, 자신들은 편안한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또한, 자신들이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삶을 연명하는 것이 결국 독일을 도와주는 행위라는 것에서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브루거는 위조지폐 완성을 의도적으로 늦추면서 반항했고, 소로비치는 이런 브루거에 직접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감싸주면서 독일의 작전 실패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영화 <카운터 페이터>를 보면 브루거와 소로비치의 사상에 따른 갈등이 그려진다. 브루거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위조지폐를 제대로 만들지 않다가 걸려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무섭지만 자신이 죽어버린다면 작전의 성공이 빨라질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늦추고 비굴하게라도 목숨을 연명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소로비치는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고, 비굴하더라도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면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소로비치에게도 마음속으로는 독일의 작전이 성공하지 않기를 빌었다. 훗날 모든 것이 끝나고 19 구역에서 살아남은 브루거는 훗날 [악마의 공장]이라는 책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결국 독일은 패망했고, 베른하르트 작전은 시행되지 못했다.


영화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1942년 12월 19구역에서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수감자들은 화재를 핑계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베른하르트는 기밀유지를 위해 경비들로 화재 건물을 둘러싸고 소방관들마저 출입을 통제했다. 수감자들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죽지 않기 위해서 영국 위조지폐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1943년 베른하르트 크루거는 수감자들을 집합시켜서 완벽하게 복제된 5파운드 지폐를 보여주었다. 1943년 여름 중순부터 1944년 중순까지 매달 650,000장의 위조지폐가 생산되었고, 해당 지폐는 1등급에서 4등급으로 나뉘었다.



1급 지폐는 전문가들도 구분할 수 없는 완벽한 위조품이었고, 독일 스파이들의 공작금으로 지불되었으며 SS친위대의 월급으로 지불되기도 했다. 해당 지폐의 생산량은 전체의 10~15% 였다고 한다.


2급 지폐는 일반인들은 충분히 속일 수 있고, 전문가들은 때에 따라 속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3급 지폐는 독일이 중립국들과 무역을 하는 데 사용되었고, 4급 지폐는 영국 상공에 살포해서 영국 경제를 패닉으로 만드는 데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조지폐는 대략 1억 5천만 파운드, 현시가로 약 11조 9,900억 원에 달했는데 이는 영국 국고에 저장된 화폐의 4배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만약 이 모든 지폐들이 영국 상공에 뿌려지고, 영국 화폐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경제가 패닉에 빠져 전쟁에서 패망했다면 지금의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전은 독일군의 소심함으로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베른하르트에서 생산된 위조지폐 중 2천만 파운드가 영국으로 유입되었고 이에 대한 여파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만약, 베른하르트 작전이 시행되었다면 영국은 현재 세계 지도에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유럽과 중동지방에 다량의 위조지폐가 유통되었고, 중동의 암시장에서 영국 파운드화는 액면가치의 75% 수준에서 거래가 되었고 영국 화폐 가치는 점점 하락했다. 영국 은행은 모든 지폐를 회수해 10파운드와 5파운드 지폐를 없애고 나중에 영국 통화 전부를 수거해 재디자인했다.



#작전이 실행되지 않고 그 이후


베른하르트 작전이 실행되지 않았던 이유는 나치스 돌격 대장 헤르만 괴링과 나치스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의견이 충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의 의견 충돌로 작전 시행은 점점 늦춰졌고, 동시에 독일의 패색이 점점 짙어졌다. 베른하르트는 작전의 보안 유지를 위해 유대인을 모두 죽이고 위조지폐를 오스트리아의 토플리스 호수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처형 직전 패튼의 기갑차량으로 인해서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 토플리스 호수에는 수많은 보물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독일의 나치군대가 퇴각하면서 약탈한 보물들을 모두 호수에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유명 매거진 <슈테른>도 잠수부를 보내 탐사를 시작했지만, 보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1959년 7월 어마어마한 양의 영국 지폐가 들어있는 철제함 9개가 발견되었고, 전문가들의 정밀감정 결과 해당 지폐들이 모두 만들어진 위조지폐라고 밝혔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베른하르트 작전의 실질적인 증거가 1959년에서야 발견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대한민국에는 친일파가 있었고, 독일도 친일파와 비슷한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배신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모든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비굴하게 살아남아서 고통의 시간에도 따뜻한 음식을 먹었던 이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부당이익을 벌었고,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아직까지 그 영향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을 정말 욕할 수 있을까? 눈 앞에 자신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시점에서 두렵지 않았을까? 과연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는 눈앞에 총구가 겨눠지는 상황이 왔을 때 나라를 버릴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순간의 비굴함을 참으면 개똥 밭에 굴러도 좋은 이승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만 동료들의 수난을 눈감으면 나는 조금이나마 따뜻한 이불에서 편하게 잘 수 있는 것이다. 극적인 순간의 달콤함에 잘못된 선택을 내린 그들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난을 맞아야 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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