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으로 걸으시오? 그쪽으로 걸으려고 하오만"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병헌은 그윽한 눈빛과 목소리로 김태리에게 어느 방향으로 걸을 것인지를 묻는다. 같은 방향이면 함께 가는 것이고, 다른 방향이었어도 함께 걷겠다는 의지가 심어져 있는 듯했다. 길이라는 건 그렇다. 같이 걷거나, 혼자 걷거나, 걷지 않거나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길의 어원은 '길들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발로 다지면서 내게 딱 맞게 길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이미 옛 선조들은 그 의미를 알았기에 '길'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길들이다를 선택한 게 아닐까?
우리는 길들이다에 대한 내용을 어린 왕자에서 자주 듣는다. 사막여우를 만난 어린 왕자는 같이 놀기를 원하지만 사막여우의 대답에 퇴짜를 맞게 된다. "난 너와 놀 수가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어린 왕자는 길들이다는 뜻이 궁금해 다시 한번 사막여우에게 묻는다.
"그건 자칫하면 잊기 쉬운 거야,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단다.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어린 왕자가 묻는다. "길들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인내심을 가져야 해, 우선 내게서 조금 떨어진 숲 위에 그렇게 앉는 거야, 내가 너를 곁눈질하는 동안, 넌 침묵을 지키는 거지, 말이란 오해의 씨앗이야.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가면 너는 내 옆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와 앉게 될 거야······"
어린 왕자와 헤어지기 전 사막여우는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준다. "잘 가, 이제 내가 비밀을 말해 줄게, 그건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네 장미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기울인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리고 있어. 하지만 넌 잊지 말아야 해.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사막여우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은 인생을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막여우가 말한 것처럼 길들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발이 아픈 구두가 편해지기 위해서는 상처가 나면서 아픈 시간이 필요하고, 처음 써보는 핸드폰이 익숙해지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가 되고, 알아가겠다는 인내심이 없으면 우리는 그 무엇도 길들일 수 없다.
특히,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내심 일지 모른다. 모든 70억 인구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모두가 처음 걷는 길이기 때문에 서툴고 낯설다. 아무도 내 길을 끝까지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무리 같이 걷기 시작했어도 모두가 똑같은 걸음으로 길을 걷지는 않는다. 구두가 익숙해지듯이, 새로운 기기기 편해지듯이 삶의 길을 걷는 것에도 우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너무 빨리 걸어가서 친해지려고 하면 체력이 지칠 것이고, 너무 천천히만 걷는다면 길의 목적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삶이라는 길을 걸으면서 무수한 선택의 고민에 빠진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해서 쉼 없이 물어본다. 모두가 인정하는 안정적인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험난하게 길들이면서 걸어갈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모두가 걸었던 길은 안정적이고 편하다. 손쉽게 남들이 걸어간 만큼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쉬운만큼 보람이 없다. 새로운 기기와의 친해질 때의 행복감, 구두가 내 것처럼 익숙해질 때의 편안함의 보상이 없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은 험하고 또 아득하다. 끝이 보이지 않고 자주 길을 헤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걷는 만큼 끝에 오는 보람은 어마어마하다. 다른 이들의 편견의 반대에 서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지치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
어떤 길을 걸으면서 삶을 길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사막여우가 말한 것처럼 모든 본인의 길이 소중한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길들이기 위한 시간이 많은 만큼, 본인에게 소중한 것은 없다. 소중히 여기며 인내심을 가지고 본인이 가는 길에 마음을 담는다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지 않을까? 사람은 살면서 계속 걷는다. 길을 걸으면서 삶을 길들인다.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같이 걷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아쉽지만,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하자. 여운이 길고 끝끝내 아쉬운 마음뿐이겠지만 각자가 길들여야 하는 무게는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과 계속 같이 길을 걸어가고 싶다. 오손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