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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내댁 May 29. 2020

5월에 대한 단상

큰일났다.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나빠져서 싫어진게 아니라 좋아져서 당황스럽다. 흔히들 아기를 키우다 보면 온 정신을 빼놓게 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 한다고들 하는데 내가 지금 그러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면 내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렸을 적 그리고 20대까지도 내가 품고 있던 꿈은 공연쟁이였다. 공연 연출을 하고 싶어서 똑같은 아카데미를 두번 이나 다닌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시도도 해보기 전에 나 스스로 꺾어 버렸지만 나는 내가 감히 예술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있다고 자체 평가하는건 자만스러우니 정정하여 나는 그토록 예술이 하고싶었다.


내가 감각이 없는 것이라면 그런 이들과 함께 멋드러지게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기를 키우다 보니 나의 예술성 혹은 예술성이 있길 바래서 항상 노력해왔던 노력형 감수성은 육아에 쓸모가 없는듯 하다.


참 당황스럽다.

워킹맘들이 흔히 겪는 증상이라는데 아기를 키우기 전의 내 삶과 커리어는 육아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아직 6개월도 안되는 핏덩이라 교육 보다는 양육 위주여서 그런가. 도움이 되는 구석이 딱 한가지 있다면 그건 다행히도 엄마가 집순이 라는거 하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코로나가 터져서 아기와 짧은 외출도 꺼려지고 사람 많은 곳도 피하게 되니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슬슬 문화센터를 다닐 수 있었을텐데 하며 집콕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아기가 100일이 넘어가니 통잠을 자는 일도 많아지고 낮잠도 한 두시간씩 자주니 그 시간에 집안일을 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쪽잠을 포기하고 나의 취미생활을 할 수 있지만 자연스레 아기용품을 검색하거나 육아책을 들쳐보게 된다. 이래서 육아를 하면 내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하게되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한명을 훌륭히 양육하는 것은 그 어떤 명예로운 일이나 금전적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부심이라도 가지고 아기를 키워야 그나마 내가 나로써 엄마로써 긍정적으로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다.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슬픈 하루여도 그 희생만큼 우리 아기가 더욱 예쁘게 자랄 테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주절주절 생각이 많고 떠들고 싶은지 문득 달력을 쳐다보니 오늘은 5월 29일이다. 특별한 날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날이다. 매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는 밤 열두시까지 무한 대기조였다. 회사에서 5월은 연 마감을 하는 달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초단위로 쪼개 일을 하고 특히 5월 31일까지 모든 오더가 무사히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29일 부터는 모니터를 보느라 화장실도 참다참다 가곤 했다.


회사 내에서의 우리의 대화는 욕에 버금가는 수위의 대화 혹은 외침, 절규들이 오갔다. 그렇게 31일이 지나고 6월 1일이 되서야 탈진해서 잠이 들고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하곤 했다.


갑자기 회사 생각을 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7년 동안 매년 5월 한달 내내 발을 동동거리며 마감을 쳤는데 이 시간에 낮에 집에서 배달시킨 햄버거나 먹으며 컴퓨터나 끄적거리다니.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아기가 아주 사랑스럽게 잠들어있다.


내 삶의 2막이 시작 되었나보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잠깐 앞을 가린다. 난 절대 우울해지지 않을테야. 누구보다 보람되고 알차게 육아휴직 기간을 보내고 멋지게 복귀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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