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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날의 하늘은 흐렸을까

by 짱강이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흐린 하늘에 던져져 허우적대던 날이 있었지


사실 하늘에 풍덩 빠져 버렸단 건 핑계였어

나는 조난당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말이야

나는 그저

낭떠러지에 서서 저 무저갱의 불구덩이를 관망하고 있었거든


흐린 하늘, 알 수 없는 불안감, 내 옆에 있는 당신.

서로의 불안감은 붙잡은 손을 통해 흘러 흘러 눈동자에 담겼지


과거는 인간을 근본적인 무기력에 밀어 넣곤 하지

과거를 과거대로 묻는 인간은 거의 없을 거야

왜냐하면 그건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내 지구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지


한때는 세상의 끝이 종말인 줄만 알았지

그 종말 뒤에도 누군가의 피는 흘러 흘러 이 지구를 돌고 있다네










신은 뒤졌다.

니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21세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10대가 내린 결론이었다.


한여름

평범하디 평범하게 살던 그녀에게 인생의 변수란, 시원하게 말아먹은 입시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도 어김없이 20살, 만 19세라는 방종이 찾아왔다.

그녀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건 글쎄...


만 19세 미만 판매 금지

선악과 같던 그 라벨이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촌스럽게도, 1월 1일 0시를 기다리던 여름은 민증을 챙겨 긴장까지 하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외워 뒀던 담배 이름을 중얼거리며.


에쎄 히말라야 하나요.

안타깝게도, 첫 담배의 기억은 최고였다.

여름은 방종의 마스크를 쓴 채, 새해의 달 아래서 담배를 딸딸 피워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폐를 채우던 든든한 니코틴은 만 18세에게 책임 없는 해방감을 선물했다






안타깝게도, 무의미하게 내쉬고 내뱉는 연기가 인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자욱하게 깔린 연기는 그녀를 서서히 질식시키고 있었을지도.





여름은 하마터면 본인의 정강이를 꾹꾹 눌러 보는 의사의 손을 물어 버릴 뻔 했다.

"특별한 외상은 없네요. 물리치료 잘 받아 보세요."

불타는 금요일 밤의 정형외과엔 동태눈깔의 의료진들만이 존재했다

그런 의료진들 사이에서 여름은 속으로 육두문자를 씹을 뿐이었다

이게 씨발 뭐지? 나 뭐하고 있는 거지? 니네 누군데?


뒤집어쓴 유리 조각들, 부어오른 정강이, 간간이 피가 맺힌 이마.

이례적인 거지꼴을 거울로 마주한 여름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문 열어주세요 제발 문 열어주세요 문 열어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기억에도 없는 방언이 터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간간이 일삼던 몸의 입에서는 비명과 살려달라는 고성만이 흘러나왔다



택시.

여행 후 집으로 돌아가던 택시 안이었다.

흐린 하늘에 휩싸여 집으로 향하던 그들.

그리고 늘 그렇듯, 인생의 변수는 예고도 없이 우리네 일생에 들이닥치곤 한다.


<#18, 차 안.>

흐린 하늘, 잠깐의 정적, 불안을 감지하곤 꼭 쥐던 그녀와의 손. 그리고 몇 초 후, 전쟁이 나기라도 한 듯 고막을 파고드는 파열음.

앞으로 기우는 몸, 자욱한 연기, 여기저기서 끊어질 듯 나는 고통의 신음.


일련의 씬들이 개연성 없이 막무가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막무가내로 봉합되어 교통사고라는 이름을 달게 됐다

그렇게도 생명을 구걸하던 여름은 겨우겨우 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


곡소리와 함께 몸 이곳저곳을 부여잡고 나오는 가족들과 다르게, 여름의 몸은 아프지 않았다.

여름은 그저, 눈이 올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을 복선 삼아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꺼이꺼이 울 뿐이었다.



고속도로 바닥에 지리멸렬히도 흩어진 유리조각, 이제야 보이는 터진 에어백, 시원하게 찌그러진 택시. 그 뒤엔 F1 경기를 막 마친 운전자.

이제야 부랴부랴 상황 파악을 하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역시 F1 선수셔서 그런가, 어느 한 군데 망가진 곳이 없었다.

운이 좋은 인간 같았다.

깡 좋게 운전자 보험도 없고. 안타깝게 돈도 없고. 그저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5중 추돌 사고를 내 버린 화끈한 남자.


여름은 그렇게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이했다. 축하의 말 대신 고통의 신음을 들으며.

훗날 그녀에게 물으면, 그녀는 차라리 몸이 아팠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라는 말을 비소와 뭉쳐 내뱉을 뿐이다





그대로 폐차장에 끌려간 택시, 그곳에서 챙겨 온 일부의 짐, 여전한 거지꼴.

가족들은 어떤 말을 할 틈도 없이 교통사고 잔해들을 빨래통에 넣었고, 유리조각을 털어내기 위해 샤워를 했다

좆같네.

여기에 깔끔한 한 줄 평까지.



끼익, 펑.

결국 그렇게 잠든 여름의 꿈에서는 개연성도 없는 장면이 자꾸만 반복됐다.

살려달라며 창문을 박박 긁던 그녀를 이젠 3인칭 시점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새벽에 잠에서 깬 여름은 침대 옆 스탠드를 켜고 앉아 담배를 딸딸 태운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꿈이겠지. 그거 나 아니었어. 이거 다 몰카야. 나한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다시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일들이야. 괜찮아. 나는 괜찮다.

일련의 씬에 대한 감상평과 담배 연기를 뭉쳐 내뿜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세상은 각자에게 잔인하기 바빴다.

나의 아홉수는 지독하리만치 잔인했다





가족들과 폐차장에 갔다

더 이상 악몽이 아니었다

끔찍한 현실이었다

차라리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었으면 싶었던 현실이었다


우리는 압력 프레스기에서 막 꺼내온 것만 같은 택시를 봤다

현실을 알아챈 그들은 죽어 버린 잔해들을 파헤쳐, 그나마 헐떡이고 있는 짐들을 꺼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던 날, 캐리어에 들어 있던 오메기 떡들은 숨을 거둔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장기는 어떤 점에서
누구나의 삶에 놓여 있는 보편적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작게든 크게든,
우리는 그 시기를 지나며
영혼의 허기와 빈 구멍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소년들에게 구멍은 너무나 자주,
복잡한 형태를 띤 채로
삶을 침범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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