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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태어남의 무게라는 건 누구의 것인가

일단 내 몫은 아니야

by 짱강이

나는 유튜브를 생활소음 삼아 사는 사람이다. 늘 그랬듯, 내가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놓고 이것저것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사실 스케치래 봤자 생각이 나는 대로 작은 수첩에 몽땅 적는 게 다지만 말이다) 마침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우연이겠지만, 그는 요즘 나의 화두를 읊어냈다.

나의 화두는, 태어남은 과연 축복받아 마땅할 일인가?

그와는 조금 동떨어진 답변이었으나, 그는 내 화두와 관련된 답변을 내놓았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고 보니 우리가 된 거고, 태어나 보니 이 세상에 온 것일 뿐인데, 자꾸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하는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사실 10대부터 어떤 꿈을 가지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지킴으로써 청년기를 보낸다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 인생인데, 나는 몇 살에 무엇을 할 것이고, 뭐 이렇게 확정짓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웃긴 일이다.

우린 그냥 태어나 보니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평생 자신의 진로를 모르고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불행하다거나 슬플 일도 아니다.. 뭐 이런 류의 답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저 태어나 보니 우리가 되었을 뿐이다. 적확히는, 태어나 보니 나 자신이었다. 요즘은 내 존재 자체, 태어남 자체에 버거움을 느끼는 듯하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 어버이날을 맞아 새삼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 어버이날에 무엇을 감사 드려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버거웠고, 가증스러웠다. 그래서 내게 어버이날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라는 자문에 도달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다. 자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그냥 숫자의 흐름대로 흘러갈 뿐인 무수한 하루 중 하나, 지긋지긋한 겨울 기운이 가시지 않은 5월의 어느 날, 내가 눈을 뜨자마자 그 끔찍함을 견뎌내야 하는 네버 엔딩 인생 중 한구석. 딱 그 정도였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스러웠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다. 애초에 태어남은 이런 거란다, 하고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준 이도 없었으며, 인생이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철저히 괜찮은 척 하는 인간 1이 돼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체득해야 했다. 그 책임소재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상념에 맡겨두고 있다. 조금 전 화두가 왜 살고 있나? 였다면, 지금은 이 태어남의 무게를 어느 누구에게 지게 할 수 있는가? 인 것이다.

애초에 내 화두가 태어남의 무게를 주제로 두고 있는지조차 희미해질 때가 있다. 나는 그냥 지금의 상처를 타인에게 어떻게 해서든 위임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면에 역겹게도 흡착돼 있는 억울함과 분노는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하루하루 그 팽만감을 더하면 더했지, 결코 가벼워지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는 철저히 제삼자인 인간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인간의 탄생은 정말 축복일까요? 글쎄요.. 그렇지 않을까요? 나는 흐릿한 대답에 대강 수긍하며, 아니라는 대답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수준 낮은 답변에 대화를 포기했지만 말이다.


사연 없는 인간은 없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정신과 의사도 내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당신은 모든 정답을 알고 있다고. 근데, 그 사연으로 죽어나가는 영혼의 마지막 발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어차피 이마저도 누군가가 보기엔 자기연민이라는 늪에 묻혀 버린 자의 신세한탄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사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아닌가? 이게 자기연민으로 보인다면, 내가 그동안 써 온 자기혐오성 일기들과 메모들을 싸그리 모아 메일로 보내 주고 싶다. 우리 다같이 미쳐 볼까요?)

사연과 고충 없이 사는 인간은 없다. 근데 그 사연과 고충으로 인해 점점 죽어나간 영혼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뉴스에서 자살자 신분으로는 종종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근데 나는 자살자가 아닌 죽어가는 영혼으로서 마지막 발악이자 도발을 해 볼까, 한다. 이유는 살아온 시간이 억울해서. 그래서 인생을 상대로 드루와드루와를 시전해 볼까 한다.

어차피 나의 고충은 너무도 복잡해서 나 자신마저도 언어로 다 정리하지 못했고, 설사 이를 명문화해서 발행한다 한들 이에 공감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감하는 이가 있어도 내게 딱히 위로나 힘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총성이 울리고 막 달리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내가 반칙 선수에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고 쓰러졌다. 별 거 아닌 듯해서 일어나 다시 뛰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전거를 탄 양아치들이 내 곁을 지나면서 내게 발을 걸었다. 나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데미지가 컸다. 그래서 넘어지며 몇 바퀴 굴렀다. 아프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결승선이 코앞이었기 때문에 다시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엔 발과 무릎이 엉망이 됐다. 그래도 악착같이 달렸다. 고통보다는 황당함이 앞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제 결승선까지 5초. 4초. 3초. 2초. 1초. 땡.

종료음이 울렸다.

근데 완주 선수 명단에는 내가 없다. 내가 수많은 반칙을 당하며 바톤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반칙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숨이 턱끝까지 찼고, 그저 하늘을 보며 누워 있을 뿐이다.

피실피실 웃음이 샌다. 이제야 피투성이인 팔꿈치와 무릎이 대충 보인다. 피는 운동장의 아스팔트에 흥건히 퍼져 나간다. 웃기다. 그냥 웃겨.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그랬더니 이젠 화가 난다.

주위는 조용하다. 밤이 왔다. 내 뒤통수를 치고 내게 발을 걸었던 이들은 이미 집에 가고 없다. 그들은 온전한 상태로 완주 명단에 올랐을 것이고, 집에 가서 깨끗이 샤워까지 했겠지. 근데 지금 나는 뭘 하는 거지. 왜 날이 저물도록 하늘만 보고 누워 있는 거지. 죽은 건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근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숨을 토해낸다. 아까의 그 엉망진창이던 호흡이 정리돼 고요해졌다.

억울하다. 미치도록 억울하다. 이미 억울해서 미친 것 같기도 하다.

다시금 피가 흐른다. 나는 내 몸 하나 일으키기도 힘든 인간이 됐다. 일어나서 몇 걸음만 가면 약국인데. 죽어도 당도하지 못할 곳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눅눅하고 미적지근한 출혈을 느끼며 그냥 제발 좀 멈춰라 하는 막연한 소망을 품어 본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사랑했고, 미워했으며, 못내 증오했다.

언젠가 이 태어남의 무게를 내게 감당하게 만든 주체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잔악하게 돌려줄 것이다. 이 무게를. 그에 나의 고통을 배로 더해 떠넘길 것이다. 그리곤 평생 저주할 것이다. 아니, 죽어서도. 그 이후에도. 언제든.



이렇게 내가 애정하는 시를 결론에 두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自殺者를 위하여

마광수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 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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