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짧지만 긴 인생 이야기

실패, 또 실패, 끝내 성공

by 카리스마회사선배

오늘은 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태어나면서부터 예민했던 딸은 울음소리도 신경질적이었고, 입도 짧아 찔끔찔끔 먹었다. 잠도 잘 자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출근해야 하는데, 새벽 두 세시에도 말똥말똥한 딸 때문에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말이 빨라 가끔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운동신경은 느려 돌이 돼도 잘 걷지 못했다.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내성적 성격이다 보니 놀이터에서도 문화센터에서도 혼자만 껌딱지처럼 엄마한테만 붙어있어, 민망한 경우도 많았다.


이런 성격이 걱정되어 놀이방 다음으로는 매일 수영을 해야 하는 YMCA 아기스포츠단에 보냈다.(노홍철이 아기스포츠단 선배다.) 아침마다 가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억지로 얼르고 달랬고, 며칠 지나니 제법 적응도 하고, 수영도 곧잘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딸을 키우면서 첫 번째로 잘한 결정이 바로 아기스포츠단에 보낸 일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조선족 베이비시터가 한글을 몰라 회사 점심시간마다 달려와 준비물을 챙겨줬고, 시험날짜가 잡히면 국, 수, 영, 사, 과 전 과목을 가르치며 딸에게 정성을 쏟았다. 수영, 독서, 구몬수학, 중국어, 한자, 영어학원, 피아노, 주산학원 등 안 보낸 학원이 없을 정도로 특기를 찾으려 애썼다. 심지어 은퇴한 프로 바둑기사까지 집으로 오게 해서 2년여간 바둑도 가르쳤고, 회장단 출마를 위해 웅변학원도 보냈다.


부작용이었을까? 4학년 말 갑자기 학원을 다니기 싫다고 했다. 속상함과 배신감이 들어 1년여간 과감히 모든 학원을 끊었고, 공부를 직접 가르치는 것도 그만두었다. 한동안은 신나게 놀더니 연말쯤 되니 영어와 수학학원은 보내달라고 했다. 딸이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기까지는 무려 3년 여가 걸렸다. 중학교 2학년 정도가 돼서야 스스로 계획하고 공부하는 습관이 잡혔다. 가장 후회되는 대목이다.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하게 했어야 하는데, 결국 지름길을 찾아 주려다 오히려 멀고 먼 우회로를 타게 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는 공교롭게도 과학중점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영재고, 과학고 입시에서 낙방한 아이들 사이에서, 과학엔 관심도 없던 딸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과학중점반만 내신을 따로 평가하다 보니 내신 한 등급 올리는데도 엄청난 고전을 해야 했다. 거기다 딸에 대한 과대평가와 수시전략 실패로 결국 재수를 하게 되었다. 길에서 대학교 학과 잠바를 입은 친구들을 만나면 전봇대 뒤로 숨는 딸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졌다. 재수 후 정시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토하면서 따로 격리 시험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또다시 원치 않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교 OJT를 받고 집에 오던 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우는 딸을 보며 또 한 번 가슴이 미어졌다. 그날 이후 딸은 이상할 정도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레스토랑에서 서빙도 하고, 과외도 하고,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다. 그러던 2학년 초, 딸이 말했다. 엄마, 나 편입하면 안 돼? 딸, 이제 인정할 거 인정하자, 대학교는 크게 의미 없어. 전국에서 한 두 명 뽑는 편입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엄마는 반대야. 딸이 또 실패경험을 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엄마, 나 이렇게 살다 간 평생 루저로 살 것 같아. 편입학원 다니려고 아르바이트해서 오백만 원도 모아 놨어. 허락해 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 거였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딸이 또 실패할까 걱정됐지만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예쁠 나이에 딸은 시커먼 운동복을 입고 미친 듯이 공부했다. 고3 때보다도, 재수 때보다도 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10개 중 9개 대학 편입시험에 합격했다. 합격발표가 있던 날, 딸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딸아, 오늘을 절대 잊지 마. 넌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앞으로 엄마는 네가 뭘 하든 잔소리 안 하고 응원만 할게. 넌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야.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었다.


편입 후부터 딸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웃음이 많아지고 자신감도 넘쳤다. 성적도 과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진로를 알아보기 위해 교수님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어서 내가 알던 딸이 맞나 싶었다. 학부를 끝내고 국내 수위의 대학원에 들어가 종양면역학을 전공했다. 국과수에 들어가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싶다고 했다. 정의로운 딸에게 잘 어울리는 결정이었다. 수백 마리의 쥐 실험을 하면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논문을 쓰는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아빠쥐가 새끼쥐를 잡아먹을까 봐 새벽에도 뛰어나가 분리시키고, 실험쥐가 탈출하는 바람에 연구소 구석구석을 뒤지기도 하고, 실험이 안된다고 몇 날 밤을 새기도 하며 힘들게 석사를 마쳤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야심 차게 석사를 끝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돌렸지만, 3개월 동안 34번의 고배를 마셨다. 학교도, 학점도 우수한 편이었지만, 경기침체와 AI 불확실성으로 인해 신입을 거의 뽑지 않았다. 뽑는다 해도 중고 신입이거나, 극소수만을 뽑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실패가 반복되면서 딸은 다시 손톱을 물어뜯었다. 점점 말수도 줄어들고, 밥도 잘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방에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안 되겠다 싶어 딸과 둘이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리조트로 갔다. 하루 세 시간씩 여섯 시간 면접 특훈을 강도 높게 진행했다. 직장을 오래 다녀 늘 미안했던 엄마가 면접 노하우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딸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여러 번 토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치른 35번째 면접, 딸은 드디어 바라던 글로벌 제약회사에 최종 합격했다. 딸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네. 하면서도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웃음을 되찾은 딸에게 지난주 오피스텔을 얻어 주었다. 물론 계약금만 지원해 줬고, 월세는 스스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복층이고 햇빛도 잘 들어온다며 인테리어를 할 생각에 부풀어 있는 딸을 보며 흐뭇하고 고마웠다. 한편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자식은 이렇게 독립하는 거구나. 직장 다니느라 부모와 떨어져 살다가 얼마 있다가 결혼한다 하겠지. 본전도 못 뽑고 시집보낸다는 아버지 말씀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이제야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평생 곁에 꼭 붙어살 것 같던 딸이었는데.


수시 실패, 재수, 편입, 34번의 면접 탈락,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내 해내고만 나의 딸이 너무나 자랑스럽다.(정리정돈 안 하는 건 여전히 맘에 안 들지만.) 이제 따뜻한 둥지에서 떠나려 푸드덕 날갯짓하는 파랑새 같은 우리 딸이 잘 해내길, 그래서 많이 행복하길.. 간절히 빌어본다. 사랑한다.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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