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를 준비하며 가출석부를 손에 들었다. 올해에는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몇 번씩 이름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나중에 아이를 만났을 때 좀 더 친근하게 부를 수 있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아이를 부르는양...
학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하는 4학년이라, 별 탈 없이 수월하게 한 해를 보낼 거라 기대했다.
가출석부를 손에 든 채 보건실에 약을 받으러 갔다. 개학 전에 건강관리를 잘해야 하는 데 2월은 빨리 지나가면서도 할 일은 많고 은근히 신경 쓰일 일이 많다 보니 몸이 아플 때가 많았다. 보건선생님한테 약을 받는 중에 손에 든 가출석부를 보였다. 아무래도 보건실을 자주 드나드는 아이들을 보건선생님이 잘 아실테니...
보건선생님은 "아~ 민강이가 선생님반이구나. 아휴~ 민강이가 일 년 내내 매일같이 보건실에 왔다 갔어요. 틈만 나면 아프다고 오는데 진짜 아플 때도 있겠지만 꾀병일 때도 많고... 올해 잘 보셔야겠네요."
' 민강이? 보건실을 방앗간 들리듯 들린단 말이지? 이제 어림도 없다! '
혼자 마음 굳게 다짐을 하며 보건실을 나왔다.
개학을 하고 우리 반에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한 명씩 보면 너무나도 예쁘고 귀엽다. 멀리서 보면 더 예쁜 거 같다. 그런데 가까이 두고 자주 보거나, 단체로 몰려 있을 때는 여지없이 징그럽다. 어떻게 선생님이 아이들을 징그럽다고 할 수 있나 싶겠지만, 한 명씩 보면 이쁜 아이들도 몰려 있으면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아이들의 민원사항은 끝이 없으므로 징그러울 수밖에... 그 아이들 속에서 민강이는 티가 났다.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교실을 들어오는 아이의 자세와 표정이 건들거린다. 목소리도 가볍고 높다. 그래도 민강이의 웃는 얼굴은 상대방도 미소 짓게 했다. 옅은 미소를 뒤로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보건실은 자주 못 간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3월 학기 초. 아직 아이들 파악이 다 안 되었는데 학부모 상담주간이 있다. 거의 모든 학부모님들이 상담을 신청했고, 나는 5일간 수업 후 5-6명씩 엄마들을 만났다. 아이들과 닮은 외모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억양 말투 목소리 등도 닮은 구석이 많은 엄마들을 만나며 유전의 힘과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는 것을 자주 느끼곤 했다.
윤성이 엄마가 상담하러 왔다. 윤성이 이야기는 조금 나누고, 민강이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민강이랑 같은 반이 되지 않길 바랐는데 또 같은 반이 되어서 너무 신경이 쓰인다는 말로 시작했다. 민강이 때문에 윤성이가 기를 못 펴고 마음 상해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민강이 엄마는 알면서도 단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았던 울분이 터졌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그간에 어떤 사연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속을 많이 끓인 거 같아 안타까웠다. 일단 접수! 윤성이와 민강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더 유심히 살피기로 말이다.
정우 엄마와 전화상담이 이어졌다. 정우 엄마는 정우와 정우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우 동생은 장애가 있고 그 때문에 정우에게 신경을 많이 못쓰고 있다는 말을 한참 했다. 엄마의 노고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정우 엄마도 민강이 이야기를 했다. 민강이가 정우 동생까지 들먹이며 놀리고 정우한테 막말을 해대서 아이가 울고 온 적이 있다고 올해는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라고 말이다.
또 민강이다. 하~~ 도대체 민강이는 그동안 어떻게 지낸 것일까?
드디어 민강이 엄마가 상담을 왔다. 이미 신경이 곤두선 표정으로 하지만 감정을 애써 억누른 듯한 매무새로 자리에 앉았다. 민강이 때문에 엄마도 무척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상담도 받아보고 애를 썼지만 막상 상담을 하러 가면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 엄마들이 다 우리 민강이를 너무 문제아로 보는 것도 신경 쓰인다고 말이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아이들을 둘러싸고 엄마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다.
"어머니 저는 민강이가 좋아요. 민강이 잘 지켜보고 학교생활도 잘하도록 지도하겠습니다."
하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민강이가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개구쟁이짓을 했구나 싶었지만 민강이를 생각하면 짠했다. 막상 교실에서 보면 윤성이도 정우도 민강이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마음 상한 일이 있어도 그렇게 오랫동안 맘에 담아 두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놀고 또 놀다가 싸우고 그런다. 아이들도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배우고 관계를 맺어가는 거라 그 과정을 성장의 시간으로 지켜봐 줄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말썽꾸러기 어쩌면 나쁜 어린이로 낙인이 찍힌 민강이. 그 녀석 얼굴에서 외롭고 어두운 기운들이 한 번씩 내비쳤다. 그게 마음이 쓰여 민강이를 더 자세히 살폈다. 친구들에게 심한 말을 잘한다고 했지만 민강이의 일기를 보면 마음씀이 참 따뜻했다. 민강이의 속마음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스러움이 가득했다. 일기장 댓글로 민강이를 칭찬했다. "민강아 솔직한 네 마음을 잘 썼구나. 민강이의 일기를 읽으니 선생님 마음도 좋아진다."
원래 사생활 침해를 문제로 일기를 읽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일기를 통해서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민강이도 일기만큼은 꼬박꼬박 써왔는데 억지로 쓴 글이 아니라 단번에 휘리릭 적어 낸 글이고, 한 바닥을 가득 채워서 쓰곤 했다. 이 정도의 글을 쓰는 아이라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요,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런 민강이가 어쩌다가 이런 낙인이 찍힌 걸까...
한 날은 초점을 잃은 어둡기 짝이 없는 침울한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1교시를 보내고 민강이를 불렀다.
"민강아 오늘 아침에 뭐 힘든 일이라도 있었니?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괜찮아요. 아침에 엄마한테 혼나고 왔어요."
누구라도 아침에 등교 전, 출근 전에 잔소리를 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금기다. 꾹~ 참고, 아침에는 즐겁게 가족을 내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 역시도 아침부터 혼을 내거나 훈육은 하지 않는다. 때로는 잔소리가 훈육으로 둔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민강이도 좀 자랐는지 큰 사건사고 없이, 보건실을 들락거리지도 않고 일 년을 보내고 있었다. 민강이도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을 텐데... 작은 것이라도 칭찬할 일이 있으면 민강이를 칭찬하고 살뜰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 엉뚱 발랄한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혼을 냈지만 그 마저도 순순히 인정하고 다음에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큰 발전이라 여겼다.
학기말이 되어 반편성을 했다. 9개의 반으로 나누어 편성하다 보니 민강이만 혼자 배정이 되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누가 보면 일부러 그랬나 싶은 편성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민강이반에 민강이랑 친한 친구가 배정이 된 것을 보고 안심을 했다. 그렇게 민강이와는 별 탈 없이 학년을 올려 보냈다.
가끔 민강이는 우리 교실로 와서 인사를 하고 가곤 했다.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어느 날은 교실 안까지 들어와서 "선생님 저 수학 90점 받았어요."하고 자랑을 했다. "우와~ 민강이 수학 공부도 열심히 했네. 5학년 수학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공부 많이 했구나. 잘했다." 이렇게 칭찬받고 교실로 돌아갔다.
민강이는 '내 편'이 필요했다. 잘못하는 것도 많고 말썽 피운 일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해해 줄 '내 편'말이다. 온전히 민강이를 이해한 것도 아니고 민강이 덕분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3월에 민강이에게 날아든 비수들 덕분에 나는 어느 정도 민강이의 방패가 되고 싶었나 보다.
살다 보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내 편'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힘을 낼 거 같다. 나는 아주 조금 마음을 내어 주었을 뿐인데 민강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었나 보다. 지나고 보니 민강이에게 더 고마워할 사람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