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어가니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내가 만나는 아이들도 많이 변했다.
옛날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며 지금의 학교나 교육문제를 생각하면 안 된다. 교실 환경도 학생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나도 세월이 가면서 더 무던해지고 여유가 생겨서 아이들을 대할 때도 많이 너그러워졌다. 그럼에도 어이가 없어서 불끈할 때가 있다. 발표를 시켰는데 안 하겠다고 할 때다. '아니, 선생님이 네 생각을 말해보라고 하는데 안 하겠다니...' 일장 연설이 나올 때는 이럴 때다.
똘똘하고 말이 많은 은석이는 재잘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수업 시간 내내 이러쿵저러쿵 자기의 의견을 말하곤 했다. 수업 시간에 말을 하려면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서 말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만 쉬지 않고 여기저기 끼어들어 말을 해서 지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러는 은석이가... 발표를 해보라고 했더니 "저 안 할래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은석아. 선생님이 발표를 하라고 할 때는 하는 거야. 선생님이 말해보자 했는데 방금 은석이처럼 '저 안 할래요.' 하면 수업이 어떻게 되겠니? 너도 나도 안 하겠다 하면 수업이 되겠니? 발표할 사람~? 하고 물었을 때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선생님이 네 생각을 말해 봐~라고 했을 땐 무슨 말이라도 하는 거야~."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뒤로 "안 하겠다."는 아이는 없었지만, 은석이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는 미주알고주알 말을 하고 정작 발표는 자진해서 하지 않았다. 손을 들고 나오려다가도 '아 저 안 할래요~'하고 다시 들어가곤 했다. '무슨 트라우마가 있나~?'
은석이 어머니와 상담을 했다. 은석이가 발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나...
저학년일 때, 발표를 했는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적이 있고 그 이후로는 발표를 꺼린다고 했다. 이래서 상담은 필요한 거다. 아이에 대해 같이 의논하고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발표에 대한 트라우마를 없애도록 학교에서 애써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가정에서 어머니가 더 애가 타셨는지 은석이에게 하루에 한 번은 발표를 하고 담임 선생님께 사인을 받아오라는 미션을 주었다. 은석이가 발표를 매일하고 오면 좋은 선물을 받는 건지 매일 발표를 한 후 내게 사인을 받아갔다.
아이가 주저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역시나!' 그랬구나 하면 또 그것을 돕기 위한 일을 하면 된다.
국어시간이다. 마음을 전하는 글쓰기를 배우고 있었다.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써서 발표를 하기로 했다.
"친구한테 써도 돼요?"
"엄마한테 써도 돼요?"
"1학년 때 선생님한테 써도 돼요?"
~
"그래 되지. 누구라도 다 돼~"
정작 지금의 담임인 나에게 써도 되냐고 묻는 아이는 하나도 없고, 계속 누구 되냐고 묻기만 했다. 누구든 다 되고 말고~
손을 들고 발표하면, 늘 손을 드는 친구들만 들어서 나는 주로 뽑기로 뽑는다.
"발표할 사람, 뽑기로 뽑을 거야~" 하고 미리 예고를 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대비하게끔 한다. 두구두구두구~ 아이들은 누가 뽑힐지 궁금해하면서 자기는 아니길 바란다는 제스처를 하기도 하고, 꼭 내가 뽑혔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기도 한다. 뽑기 운도 이럴 땐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 법! 늘 원치 않는 아이들에게 뽑기 운이 있다.
똘똘이 스머프처럼 아는 것도 많고 논리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지훈이가 걸렸다. 평소 같으면 싫어도 휘리릭~ 말을 해버리고 말 텐데. 갑자기 발표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이건 또 무슨... 발표를 안 한다니.
담임인 나는 어김없이 열이 오른다. "지훈아, 발표를 해야지. 적어 둔 것도 있는데, 안 하겠다는 게 무슨 말이야?" 열은 올랐지만, 화내기를 더디 하는 나만의 방법. 목소리를 낮추기. 조용하고 단호하고 짧은 말로. "네가 쓴 대로 읽으면 돼!"
지훈이는 앞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내게 편지를 썼다. 오 마이 갓!
'우리 가르치느라 힘드시죠,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힘내세요.' 뭐 이런 내용이었다. 마음을 전하는 글을 쓰는데 담임인 내게 썼고, 앞에 있는데 발표를 하기가 쑥스럽고 못하겠다 해서 발표를 안 하겠다고 한 거였다.
'순간 나는 내가 화를 냈으면 어쩔 뻔했나? 이런 낭패가 또 있나?' 했다.
지훈이는 쑥스럽지만 차분하게 발표를 했고, 쉬는 시간에 나에게 와서 편지를 건네주었다.
"하하하하 선생님한테 쓸 생각을 다하고? 지훈이~ 고마워"
정색하거나 화를 냈으면 그 뒤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지훈이가 다시 나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답장을 받고 싶어요."
"어~~ 그래, 답장 줘야지. 일기장에 붙여 줄게."
'지훈아, 마음을 담아 쓰는 글을 써 주어서 고마워.
선생님 힘들지 말라고 응원해 주는 지훈이 덕분에 힘이 난다.
선생님도 힘내서 더 재밌는 수업 준비해 볼게~^^'
이렇게 해서 마음을 담아 쓰는 글쓰기는 마음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수업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화내기를 더디 하라'는 문장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굵게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