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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움 Oct 14. 2020

엘 그레코 El Greco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매너리즘 화가 mannerism

스페인 미술의 3대 거장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컨대 엘 그레코를 꼽는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에서 활동했지만 그리스 사람이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이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별명이 이름이 된 것이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크레타 섬은 에게 해 남단에 있는 큰 섬으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다. 동서양 문명이 활발하게 교류하던 곳으로 비잔틴 동방교회의 문화, 로마 가톨릭 문화, 이슬람 문화가 뒤섞여 있었다. 이런 크레타 섬의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 엘 그레코가 자라서 그의 그림에 다양한 양식을 사용하는데 좋은 재료가 되었다.


엘 그레코는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천재적인 솜씨로 크레타의 최고 화가 위치에 올랐다. 그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성모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성 누가>, <성모의 영면>,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스도의 세례> 등이 있다. 엘 그레코는 그 당시에 크레타를 지배하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베네치아는 세상의 다른 곳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미술의 3대 거장인 티치아노가 살아 있었고 베로네세와 틴토레토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을 당시, 엘 그레코는 그들의 작품에 감화되어 새로운 미술 양식인 강렬한 빛의 처리와 명암의 통합적 기능을 받아들였다.


당시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피렌체의 화가들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구현하기 위한 '내적 디자인'을 강조하였으나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언제나 색채와 빛을 염두에 두었다. 그들은 이미 인상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엘 그레코는 베네치아에서 당대의 거장 티치아노와의 만남으로 티치아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선다.


스승 티치아노가 그린 <회개하는 막달레나>와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를 보며 등장인물의 색채의 조합을 배웠다. 그리고 베네치아 미술이 추구하는 감정과 느낌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는 3년 동안 베네치아에서의 생활에서 크레타의 비잔틴 양식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는 활동 무대를 로마로 옮겼고 그 당시 로마는 피렌체의 마니에리슴 양식에 강력하게 빠져 있었다.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약 5년간 활동했고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옮겨 간다. 당시 스페인은 펠리페 2세가 통치하는 시대였다. 그는 스페인 문화를 한 단계 높인 인물로 스페인의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대규모 건축을 시작했을 때 마드리드에서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함>이란 작품으로 스페인 왕실의 궁정화가로 활동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드리드를 떠나 톨레도에 정착한다. 톨레도에서 그린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란 작품으로 자신의 예술적 미학을 꽃피웠다. 이 작품은 톨레도에서의 첫 작품이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오랜 수업을 거쳐 만들어진 엘 그레코만의 화풍이 처음으로 나타난 걸작이다. 톨레도 대성당이 유명한 이유도 엘 그레코의 작품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교회의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성직자들이 군중의 머리가 그리스도보다 높은 곳에 있고 복음서에 없는 세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 점에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은 당시 다른 화가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소재의 작품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 형을 당하기 전에 옷을 벗기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한 그림 주문자의 수정 요구에 그는 응하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작품을 완성한 후에야 화가와 의뢰자가 합의를 해서 그림 값을 책정했는데, 이 작품의 경우 양자가 생각하는 금액 차이가 4배 정도가 되니 결국 분쟁이 발생하였고 엘 그레코는 자신이 생각한 가격의 반도 안 되는 돈을 받아 이 일로 인해 교회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이후에도 엘 그레코는 그림 값 문제로 분쟁을 자주 일으켰다. 그는 의뢰자의 요구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인문지식과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그리는 예술가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소송 비용이 그림 값보다 더 들더라도 작품을 깎아내리려는 의뢰자에 맞서 예술적 자유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였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미친 화가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세기에는 낭만주의와 함께 그의 작품과 천재성이 재평가되었고 현대의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화가들은 그의 독보적인 상상력에 매료되어 그를 자신들의 선구자로 생각했다.


엘 그레코는 이런 말들을 언급했는데

'인체의 비례는 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가의 주관에 맡겨져야 한다.'

'회화는 뛰어난 시작품과 같은 것이다. 왜냐면 회화는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많은 화풍들을 공부했고 당시로서는 도서관이 가지고 있을 만큼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메모를 보면 과학적,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발전해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엘 그레코만의 독보적인 상상력과 신념은 그시대 기득권자인 성직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현대에는 그의 작품들이 유명할 뿐만 아니라 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그의 작품이 오히려 톨레도 대성당을 빛내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뜻이 명확하고 확고하다면 엘 그레코처럼 밀어붙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의 예술혼과 인문학적 사고와 창의력이 그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보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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