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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움 Oct 16. 2020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엘 그레코, 현대미술의 가치관을 가진 선구자로 재평가 되다.

서양미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화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했다. 그러나 엘 그레코만큼 특이한 개성을 보여준 화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엘 그레코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그는 그리스에서 태어났는데 엘 그레코란 이름은 스페인에서 활동할 때 얻은 별명으로 그리스인이라는 뜻이다. 남들은 엘 그레코로 불렀지만, 화가 자신은 항상 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를 그림에 그리스 문자로 적어 서명했다.


그는 그리스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에서 훈련을 받았고, 스페인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에는 이 세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환경과, 1520년대 이후 주류 전통이자 규범이 되어버린 르네상스 미술을 반자연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매너리즘 양식을 사용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화가들이 대거 등장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미술 양식은 완벽의 정점이었고 거장들의 방식을 답습할 뿐 후배 화가들은 미술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었다.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 화가 중 한 명이었는데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최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 등장한 화풍으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 형식과 기교를 모방하는 한편,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과장해 오히려 불안정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르네상스가 추구하는 조화와 이성, 현실성 대신 부조화와 감성, 상상을 강조했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주로 활동하며 종교화와 초상을 주로 그렸다. 베네치아 회화에서 영향을 받아 그림에서 보이는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 극적인 빛의 효과, 길게 늘어진 인체와 신비하고 기이한 배경은 매너리즘 화가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당시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피렌체의 화가들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구현하기 위한 '내적 디자인'을 강조했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언제나 색채와 빛을 염두에 두었다. 우리가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할 때 사용되는 의미가 여기에서 기인된 것이다.


엘 그레코의 대표작으로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톨레도 풍경>, <목자들의 경배>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다. 

이 작품은 스페인 산토 토메 성당에 있는데 이 귀한 작품 보려고 한참을 걸어서 잠깐 작품 설명 듣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과 귀로 찰나만큼만 감상하고 나와 무척 아쉬웠다.

엘 그레코의 대표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중세의 인물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날 벌어진 전설에 따라 그린 그림이다. 실제로 산토 토메 성당에 안치된 그의 무덤 위에 그려져 있다. 그림은 천상과 지상으로 나눠지고 천상의 인물은 왜곡된 비례로 영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반종교개혁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려진 이 그림은 본래 톨레도의 산토 토메 Santo Tome 교회에서 거행되었던 스페인 귀족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여주는데 그 착상이 놀랍도록 기발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르가스는 신앙심이 강하고 자비로웠던 사람이라 신이 그의 장례식에서 보상을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하늘이 열리고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상으로 내려와 백작의 시신을 안장하고 있다. 엘 그레코는 심판관 예수 그리스도가 기다리고 있는 하늘로 백작의 영혼을 인도할 천사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작품 상단 왼쪽의 성모 마리아와 그 반대편의 세례 요한은 이제 막 숨을 거둔 영혼을 받아들이고 신비의 자비를 중재하고자 한다.


실제 오르가스 백작이 죽은 것은 14세기의 일인데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6세기에 그려진 것이라서 지상의 장례 참석자들에게는 최신의 옷을 입혀 동시대 사건처럼 그렸다. 확실하게 신원이 파악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대부분의 조문객은 실제 인물의 초상인 것으로 판단된다. 

성 스테파누스 (왼쪽에 있는 젊은 성자)의 뒤쪽에서 화면 바깥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엘 그레코로 추측되고, 성자의 앞쪽에 있는 어린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인 조르주로 알려져 있다. 조르주는 손가락으로 기적의 장면을 가리키는데 이는 바로 여기에 교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화가가 자신과 아들을 왜 그려 넣었을까? 왜 그랬을까?


프로테스탄트 , 개신교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반박하기 위해 자애와 선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 엘 그레코는 1577년에 톨레도에 정착하였는데 산토 토메는 그 지역 교구 교회였다. 그는 이 교회가 길고 지루한 법정 분쟁에서 이긴 후 1586년에 이 그림을 의뢰받았다.


이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오르가스는 자신의 뜻에 따라 14세기에 이 교회에 기부를 하였지만 16세기에 와서 그의 후손들은 기부를 중단하려 했다. 결국 후손들이 패소하게 되었고, 승소한 교회 측에서 기념으로 산토 토메의 성직자들은 기부자인 오르가스의 명예를 기리기로 결정했다. 그림에서 오르가스의 시신을 안치하는 두 성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에 땅을 기부하며 성 스테파누스에게 봉헌할 것을 당부했던 것을 고려하여 결정되었다. 이 그림은 백작의 실제 무덤 위에 걸 예정이었기에 실제 그림이 걸리게 될 장소와 맞아떨어지도록 구도를 설정하였다. 그림은 성자들이 실제로 그의 시신을 묻을 곳에 내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비주류였던 엘 그레코, 이름도 별명으로 불렸던 그리스 사람

그는 사후 반 고흐처럼 재평가되어 시대를 앞서간 사람, 현대미술의 가치관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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