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은 아빠의 기일이다.
벌써 9년이 지났다.
나의 아빠는 알콜중독자였는데 그래서 죽었을 때 아무도 아빠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가 모든 과정을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뜨문뜨문 나서 내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일부러 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 상황만 뜨문뜨문 생각이 난다 이렇게 뇌에서 없어질 수도 있는 건가? 더 없어지기 전에 기록해보려 한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코미디였던 것 같은 상황도 생각이 난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었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9년이 지나 멀어지니 나도 그런 일들이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그렇게 슬픈 일은 아니어서 글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꺼이꺼이 울면서 장의사분께 "제일 저렴한 걸로 해주세요"하고 울고, "압축팩은 하시겠어요? 그걸 하면 유골이 보존이 잘 돼서요"라는 설명에 흐느끼며 "압축, 압축팩 해주세요" 했던 것들이 참... 지금 생각해보면 코미디스럽다.
아빠와 마지막 인사는 고등학교 때인가 대학교 때쯤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하셨고 그 후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빠가 엄마와 다시 만났을 때 나도 함께 보았고 우리는 고기를 먹었고 헤어졌다. 그리고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솔직히 연락이 아빠에게 올까 두려웠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그런데 8~9년 후쯤에 일하는 도중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평소에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아 전화를 안 받았는데 후에 문자가 왔다. 아빠의 사망 소식이었다.
알콜중독가족들의 블랙코미디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알콜중독가족들의 모임에서 한 사람의 아버지가 죽었는데 다른 멤버들이 부러워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죽기 전엔 나도 공감을 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눈물이 안 나면 어쩌지? 하고 조금 걱정도 했는데 예상밖에도 문자를 받자마자 회사에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와 떨어져 있어서 울었을지도.. 계속 그 행패에 가까운 모습을 집안에서 붙어서 보고 있었다면 눈물이 안 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후에 모르는 다른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아빠의 가족들.. 고모들이었다. 이혼 후에는 아빠와 연락이 끊긴 것처럼 고모들과도 연락이 끊겼었는데 그날 울고 있는 내게 연락이 온 것이다. 장례에 대한 얘기 인가 하고 울며 받았는데 뜻밖의 말은 사망 소식을 전한 연락에 응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랬다. 아빠의 알콜중독은 결국 돌보던 고모들까지도 손절하게 만들었고 아빠는 어떤 사회복지사가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망 전에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 인지 내 번호를 알 수 없었다가 사망하니 연락을 해야 해서 알게 된 건데 내가 모른척하면 국가에서 장례를 알아서 치러준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계속 생각해보니 그런 건지, 어떤 생각으로 내게 고모들이 그렇게 얘기했는지 조금은 알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건 너무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막막하지만 응답해야 했다.
그런데 엄마도 다른 분과 살고 계셔서 아빠의 장례를 치러줄 수 없었다. 나는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었다. 결국 나의 선택에 달렸고 나는 응답해야 했다. 지금도 그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후에 적겠다.
어쨌든 아빠가 사망한 요양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군산이었는데 그 지하철에서도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그러면서도 또 요양원은 잘 찾아갔다.
중간에 아빠를 돌봐주시던 사회복지사분을 만났는데 그것도 장례 후인지 전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분께는 진심으로 감사한데 그때는 그 마음도 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리고 기억이 나는 건 장의사분이 앞에 계셨던 것. (생각해보면 병원에서 울고 있는 내게 알선해주신 것 같다.)
그때 나는 진짜 돈이 없었고 어렸던 편이라서 대출을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장례를 치러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장의사 분을 붙잡고 "제가 돈이 없어요"하고 얘기했던 것 같다. 장의사분께서는 그럼 빈소를 차리지 말고 바로 발인하면 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기본적인 관, 유골함, 화장터로 가기 위한 버스 대여 같은 것들만 결정했던 것 같다. 심지어 상복도 생략했다. 그 장의사 분도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니 알아서 잘해주신 것 같다. 그리고 또 잘 기억이 안 난다.
빈소도 안 차리면서 대형버스를 빌려서 아빠 관만 덩그러니 들어가고 그 버스에 엄마와 나만 탔던 기억이 난다. 손님이 없으면 그런 큰 차는 필요 없던 건데.. 돌이켜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관을 닫기 전에 아빠한테 잘 가라고 얘기하라고 시키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는 건 관이 후에 닫혔는데 고모가 울며 늦게 도착해 다시 열어달라고 했던 것. 장의사분들은 한번 닫은 건 절대 열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고모도 난리셨고 팽팽한 대립 후에 결국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빠의 몫이다. 아빠가 마셨던 술잔들 속에 비극의 씨앗이 들어있었고 그래서 그게 꽃 피운 것이다. 그래서 죽어서도 이 난리, 이 꼴을 못 면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분명 다시 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 모르겠다. 어차피 콩가루집안.) 근데 그 장의사분께서 따님의 고통까지 갖고 가라그랬나? 그 비슷한 말을 하셨던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그 말이 믿어졌었다. 그게 지금도 고맙다.
화장터 생각은 난다. 생각보다 현대식이었던 것도 생각이 나고 보면서 울고 있는 내게 장의사분께서 사람은 죽으면 한 줌의 재인데 살아가며 너무 미워하고 살지 말자는 얘기를 옆에서 하셨는데 너무 우느라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한 줌의 재는 가장 저렴한 유골함에 담겨 내 손에 들려졌다. 내가 상주였던 것이다. 당연하다. 아빠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나 하나뿐이다. 유골함이 뜨끈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걸어 올라갔던 기억이 나고 또 후에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때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교회도 다니고 있었다. 빈소는 차렸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도 어리둥절했을 듯. 근데 빈소를 차리지 않았는데도 장례 후에 십시일반 모아서 부의금을 전달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거 먹튀도 아니고...) 그래서 다행인 건 장례비용을 잘 메꿀 수 있었다. 후에 고모들도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하셨고 비용을 보태주셔서 장례 후에 여러 행정처리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날, 아빠가 죽은 날. 세상에서 가장 추웠던 날이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면 내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도와주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위로들이 있었던 기억. 사람들은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그것도 지나고 보니 알겠고 그때는 세상에 진짜 혼자 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사람들이 내 시신을 나몰라라 한 것도 아니고.. 한 알콜중독자의 말로였던 건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나 싶기도 하다. 차가운 현실이기도 하고 그 말로에 연민을 느끼지만 말이다.
사람의 죽음은 엄청 큰 사건이다. 그건 많은 것을 바꿔놓고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긴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는 해외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건 무서운 일이기도 하고 버거운 일이기도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어떻게든 한국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2013년도는 내게 그런 해였다. 아빠의 죽음 이외에도 정신 못 차리는 내게 연타를 날리는 사건들이 있었고 그 후에 해외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그때 장례 때 나와 함께 했는데 왜 이리 우냐면서 뭐라 했는데 몇 달 뒤 갑자기 전화가 와서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산사람을 위한 것이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을 아빠가 죽은 후에 많이 했다. 결국 그 장례식은 산 사람을 위한,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여러 번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한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