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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Sep 04. 2020

왜 소설을 읽는가

세계는 읽혀져야 할 텍스트다

                                                     <서재에서>, 루트비히팔렌타 

    

누군가는 “세계는 하나의 텍스트다”라는 말을 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세계는 읽어내야 할 여러 개의 텍스트다 왜 그러한가. 나는 이 말을 문학과 연결 지어 좀(늘 그렇지만) 억지를 부려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세계는 텍스트다”라는 말은 세계는 읽어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읽어내야만 한다. 또 그 세계는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상태로, 즉 텍스트로 존재해야한다. 텍스트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읽어낼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고, 어떤 의미를 갖지도 못한다.   

    

만약 이 세계가 날 것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가령 집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해보자. 이 나무는 우리가 읽어낼 수 없다. 그냥 나무이다. 그러나 이 나무에 어떤 ‘이야기’를 입혀서 말과 글로 말해지고 써지면, 그것은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존재로 변환된다. 

    

이야기가 입혀진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어떤 나무’가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입힌 것을 우리는 소설이라 한다. 나무에 대해서 다채롭게 말해질 때 우리는 여러 개의 텍스트로써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계를 깊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어떤 나무’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야기가 입혀진 나무가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하는 이유가 된다.      


텍스트가 아닌 자신의 경험만으로 읽어내는 세계는 얼마나 편협하고 허약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다양한 ‘어떤 나무’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단순하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는 세계는 결코 이해될 수 없을 것이고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해 받지 못한 ‘어떤 세계’는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 세계는 읽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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