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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Sep 06. 2020

왜 소설을 읽는가 2

소설은 ‘진실’에 다가가려는 언어다.

    

<등불아래서 독서>, 제임스애벗 맥밀 휘슬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야.”

절망이 있어야 희망도 있는 법이다.”    

  

나는 위와 같은 세상의 ‘흔한 말’을 믿지 않는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실패한다고 꼭 성공하는 것이 아니며, 열심히 살아도 미래는 항상 불안하고, 절망이 반드시 희망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성공한 사람만이 실패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실패에 관심을 두지 실패한 사람의 실패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결과가 좋아야 고생스러웠던 과거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이 가득 담긴 말들’을 좋아하고 거기에 마음을 연다. ‘진실’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소설가 윌 스토는 《이야기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어떤 ‘사실’이 자신을 영웅으로 여기는 자아 감각을 뒷받침해주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덜컥 믿어버린다. 반대로 영웅의 자아 감각을 지지하지 않는 사실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교묘히 그 사실을 부정할 방법을 찾는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이야기에는 귀를 열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이다.      


좋은 문학은 이런 ‘흔한 말’에는 관심이 적다. 오히려 대개의 좋은 문학은 ‘우리가 듣기 싫은 말’ 혹은 ‘잘 들어보지 못한 말’을 더 신경 써서 다룬다. 그 ‘불편한 말들’은 잘 말해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기에 그 속에 진실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떻게 ‘진실’에 다가가려고 애쓰는가.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는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고난의 연속이다. 사는 내내 보통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할 고생을 한다. 공사장 막노동, 공장 잡부, 주요소 알바 등등.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손에 놓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모두 가족을 위해 쓴다. 연탄 까스를 마셔서 바보가 된 누이를 돌보고, 동생이 청춘시절 밖에서 낳아 맡겨놓고 돌보지 않는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고 정성을 다해 키운다. 소설을 읽다가 보면 그의 고생길이 너무도 험해서 소설을 계속 읽기가 힘들 정도다. 그의 고생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열심히 일하며 살았지만 어떤 보람도 보상도 없다. 그야말로 태어나서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죽어버린 인물’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희망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수 없다. 작가 성석제는 작가의 말에서 대놓고 말한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문학은 우리가 삶의 진실에 다가가게 하기 위해 달콤한 말들의 둑을 무너뜨린다. 진실의 말은 달콤한 말의 너머에 있다. 문학은 그 폐허 속의 현실로 걸어 들어가게 한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지를 절감하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당신이 함께 서있다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그제 서야 위로를 한다. 진짜 위로란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삶이 가진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냥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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