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기는 최고의 창조적 작업
해석의 시대, 왜 소설 읽기인가
바야흐로 해석(解釋)의 시대이다. 해석이란 “사물이나 행위 따위의 내용을 판단하고 이해”하여 나아가 그것의 의미를 산출한 내용을 말한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필요한 지식과 정보들을 선별하여 목적에 맞는 유용한 자료로 모으고 편집하여 다시 의미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생산하는 능력이다. 이렇게 도출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리켜 우리는 창조적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른바 창조력은 이 시대가 갖추어야 할 필수 능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창조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두말 할 것 없이, 창조력은 해석의 힘에서 나온다. 수집된 지식과 정보를 이해하고,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도출해 내는 행위의 전 과정이 해석이요, 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니체는 “모든 해석은 창조다.”라고 말했다. 해석과 창조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폴 김 교수는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 라는 책을 내고 한 인터뷰에서 “한국 학생과 미국 학생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수동적이고 질문도 잘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취직이 잘되는지’, ‘삼성 같은 데 취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스탠퍼드대 학생들은 주로 ‘나는 삼성보다 더 큰 회사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와 같은 질문을 한다.” 이렇게 한국 대학생들과 미국 대학생들은 질문의 차원이 다르다. 이는 학생들의 삶의 방식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수동성과 창조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대학생들이 답변에는 자신이 어딘가에 종속되어 일하겠다는 수동성이 깔려있고, 미국 대학생들의 대답에는 자신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어 일을 하겠다는 능동성이 담겨있다. 당연히 한국 대학생들의 사고와 행동은 특정 기업의 문턱을 넘기 위한 수준이 될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기업의 오너가 되었다는 상상을 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기르고 한계를 부단히 뛰어넘으려는 수준이 될 것이다. 한국 대학생들의 세계관은 협소할 수밖에 없고, 미국 대학생들의 세계관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답변을 그들의 속에 깔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생들의 사고와 행동에는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조력이 깔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소설 읽기가 왜 필요한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설을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전 과정이 바로 사고력과 창조력을 키우는 일이다. 소설 읽기는 해석의 작업을 수반한다. 세상의 모든 소설은 반드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인간과 세계에 관하여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대부분이다.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독자 스스로 찾도록 요청한다. 등장인물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가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을 인물의 말과 행동, 사건의 맥락,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고 소설이 담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식이나 주제의식은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와 같은 소설적 장치로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 그 소설적 장치들을 하나씩 이해하면서 풀어가는 과정이 소설읽기의 핵심이며,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이 소설 읽기를 통해 기를 수 있는 창조력 신장 훈련법이다.
“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명칭 안에 전령사 헤르메스(Hermes)의 이름이 섞여 있는 것은 해석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전달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할 텐데, 나에게 그것은 ‘생산된 인식의 깊이’다. 해석으로 생산되는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이런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해석이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것이 아니라 ‘낳는’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소설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최고의 창조적 작업이다. 독자는 소설이 제공하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능한 이야기를 추론하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낼 때, 소설의 깊이 읽기는 가능해 진다. 바로 이 과정이 새로운 생각을 산출하는 창조적 작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행, [소설 재미있게 읽는 법], 밥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