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행 Sep 08. 2020

왜 소설을 읽는가 4

소설은 언어로 하는 예술 

<서재에서>, 루트비히팔렌타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짬을 내어 열심히 책을 읽는다는 직장인 C.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C는 일주일에 한 두 권이상의 독서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하지만 인문, 사회과학, 문학, 실용서 까지 고루 섭렵하는 C가 넘을 수 없는 분야는 바로 문학이었다. C는 도대체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왜 뜬금없이 떠나버리는지, 이유 없이 죽어버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소설을 어떻게 읽는가는 독자의 몫이다’와 같은 말은 짜증을 유발할 뿐이었다. 그래서 C는 일찌감치 소설을 읽는 목적을 ‘재미와 흥미’에 두었다. 자꾸만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골치 아픈 책은 멀리했다. 오로지 그 문학이 나에게 재미를 선사하는가, 흥미로운 요소로 나를 자극하는가 만이  그 소설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미술 작품이나 오페라와 같은 공연은 예술의 영역으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가기 전에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소설에 대한 감상 방법을 생각하지 않거나,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이란 그저 한가롭게 읽으면서 독자에게 재미와 흥미를 주면 된다.’라는 인식이다. 물론 이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분명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고, 감동을 주며, 웃음과 재미를 주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위안과 재미가 소설읽기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술과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소설도 언어로 하는 예술로써 그 작품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과 세계의 의미들을 인물의 생각과 행동, 관계, 구조와 배경을 바탕으로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독자는 예술가가 구현해 놓은 작품을 감상하고 나름의 의미를 이끌어냄으로써 지적•정서적 지평을 확장하게 된다.      

  

이탈리의 미술가 조르조 데 키리코는 예술가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측면으로 누구에게나 보이는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형이상학적 측면인데, 이 측면은 통찰의 순간이나 명상의 순간에 볼 수 있다. 이처럼 가시적인 형태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일이 예술의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해, 사물의 두 가지 측면 중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은 의식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 측면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인식할 수 없고, 또 인식하기 어려운 어떤 영적인 부분, 즉 무의식의 세계이다. 바로 이 비가시적인 영역을 보려는 시도가 예술의 임무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예술가가 가진 심미안으로 의식 세계의 너머에 있는 어떤 부분들을 캐치하여,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구현해 내는 사람들이다. 소설가도 마찬가지이다. 소설가는  인간과 세계에서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을 인물과 사건, 시간과 공간에 빗대어 형상화한다. 소설은 소설가가 세계에 대하여 품은 질문을 예술적으로 구현해 놓은 창작물이다. 소설을 잘 읽는 다는 것은 소설가가 구현해 놓은 소설적 장치들을 이해하고 음미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이 지닌 의미 있는 해석을 도출해내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더행, [소설 재미있게 읽는 법],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왜 소설을 읽는가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