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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Sep 09. 2020

왜 소설을 읽는가 5

사고능력 신장

<생각>, 장데스 퓌졸


오랫동안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으로 통한다. 그가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 중에 하나는 “한국인은 왜 ‘독립적 사고’를 못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에는 훌륭한 고등교육을 받은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갖춘 사람들이 차고 넘쳐 나는데 그럼에도 왜 한국은 국제이슈에 관해 자국만의 비전과 시각을 제시하지 못 하는가?,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외국 전문가들이 쓴 글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 온 힘을 쏟는가?”라고 지적한다. 이어지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진단은 우리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한국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못 하는 이유’를 “서글픈 수동성”에서 찾는다. 오랜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지식 집단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잘 배우지 못했고, 미국과 같은 강대국을 과도하게 존중하는 태도가 생겨났으며, 또한 분단국가가 만들어낸 두 개의 상존하는 이데올로기 체제가 주는 습관화된 사고의 영향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적 영향으로 인해 제대로 사고하는 힘을 갖추지 못한 현재 한국 사람들의 상황을 말해준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한국 사람들은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숨 막히게 돌아가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텨왔다. 정해진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현대인들은 충분히 고달프다. 여기 어디에 능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가 끼어들 수 있었겠는가. 경쟁적인 삶은 우리에게 생각할 틈을 제공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삶에서 능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법은 없다. 난 한국인들이 변화의 가능성을 간직한 깨어있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다. 일상에 쫓겨 그저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이라 할지라도, 힘을 모아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는 사람들 또한 한국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길들여진 바보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생각하는 방법들을 충분히 훈련받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를 ‘능동적인 사고’로 이끄는 훌륭한 텍스트 중에 하나가 바로 소설이다. 소설은 그 자체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크고 작은 질문을 담고 있다. ‘능동적인 사고’는 질문을 전제한다.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이 던진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답변을 찾아야만 한다. 소설을 읽는 일은 작가가 던지는 질문에 독자가 응답하는 일이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등장인물과 사건을 상상하고 소설 속에서 구현해 낸다. 그리고 왜 그러한 인물과 요소들을, 이 시점에서, 이 시대에 내세우는지를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말하자면, 작가들은 인간과 세계가 간직한 문제들을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질문으로 만들어 소설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소설을 읽는 일 자체가 능동적인 사고를 훈련하는 방법이며 그에 대해 거듭해서 더 나은 해답을 찾아가는 일은 사고를 더욱 확장시키는 일이다.     

 

"예술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알랭드 보통, 『불안』, 은행나무)     


따라서 위의 인용문에서 ‘예술’은 문학, 소설로 바꾸어도 좋다. 소설은 우리에게 익숙한 감정이나 정서를 그대로 반복하는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는 소설은 독자에게 공감을 줄지언정 그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 좋은 소설은 ‘공감’의 영역을 뛰어 넘어, ‘공감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영역’을 다룬다. 그러므로 소설은 ‘삶의 비평’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반기를 들고 숨겨져 있는 것들을 들추어낸다.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이거나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하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무람하게 넘나든다. 독자는 현실과 허구 혹은 공감↔공감하기 어렵고 불가해한 영역 사이를 유영하면서 사유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것이 소설 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고력이다. 소설 읽기는 ‘능동적 사고력’을 형성하게 하고 그 사고력을 기반으로 인간과 사물을 새롭고 다르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소설이 주는 유익함에 대해 하나 더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석영중은 『뇌를 훔친 소설가』에서 소설을 읽으면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 중에서 뇌의 가소성과 유연성에 대해 언급하자면, “인간은 후천적으로 연습을 하고 자극을 받고 트레이닝을 거침으로써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뇌가소성이란 뉴런들이 스스로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대뇌피질에 새로운 길을 트며 심지어는 새로운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신경 가소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뇌의 ‘재배선’을 의미한다. 뇌의 재배선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무척이나 많은 일에 도전할 수 있다. 뇌가소성은 21세기 인류에게 과학이 선사하는 가장 큰 희망의 선물이다.” 소설을 읽는 일 그 자체가 뇌의 가소성을 높이고 뉴런들을 연결하며 더 나은 뇌로 발전시키는 최고의 훈련법이다. 정리해 보자. ‘능동적 사고력’이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말하며, 그것은 후천적인 훈련에 의해서 신장시킬 수 있다. 소설 읽기는 사고력 신장을 이끄는 훌륭한 방법이다. 소설을 읽으면 우리의 뇌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더행, [소설 재미있게 읽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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