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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Nov 25. 2021

굶주림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

크누트 함순, <굶주림>, 창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은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아사 직전에 놓인 한 사람의 이야기다. 글을 쓰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나’는 벌써 여러 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쫄쫄 굶고 있다. 수중에 돈은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몇 달째 하숙비는 밀려있고, 원고를 보낸 신문사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매일 굶는 날의 연속인 ‘나’에게 배고픔은 그야말로 영혼을 갉아먹는 잔인한 경험이었다. 

     

굶주림은 ‘나’의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상황으로 끌고 간다. 굶는 일이 계속되자 “머리는 가벼워져서 마치 없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고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배고픔이라는 감각은 그렇게 ‘나’의 정신을 서서히 압도해갔다.     

 

그럼에도 ‘나’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까지 하는데, 공원에서 배회하는 노인이 “우유 사게 한 푼만 줍쇼!”라고 하자 ‘나’는 입고 있던 조끼를 팔아 그 돈을 노인에게 줘 버리고는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한다.  

    

볼품없는 행색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조롱과 경멸을 당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애쓴다.   

   

“다시금 정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기분인가. 내 빈 주머니는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보니 즐거웠다. 잘 생각해 보면, 그 돈은 사실 내게 남모르는 많은 근심을 안겨주었다. 나는 냉혹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내 정직한 천성이 완벽하게 비천한 짓에 저항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스스로의 양심 앞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이 훌륭했다고 생각되었다.” (187쪽)   

  

그러나 배고픔은 인간의 자존심이나 품격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계속된다. 허기에 지친 ‘나’는 반복해서 침을 삼키고, 대팻밥을 씹어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결국 정신착란과 같은 광기에 사로잡혀 환상을 보고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차츰 변모해간다. 그것은 바싹 마르고 누추해지는 외모뿐만 아니라 사나워지는 행동과 거칠어지는 내면의 감정에서 더 심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먹을 것을 조금 얻기 위해 사람들을 속여넘기고, 부끄러움 없이 거짓말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의 돈을 슬쩍 훔친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상대에게 동정심을 끌어내는 방법까지 터득한다. ‘나’는 이런 “자신의 타락은 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고픔으로 인해 이제 ‘나’는 통증도 잘 느낄 수 없고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나’는 이제 나무껍질과 다를 바 없는, 통각이 상실된 존재가 되어간다. 

    

소설은 이렇게 배를 곯는 한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양심과 자존심, 친절과 배려는 배고픔이라는 감각 앞에서 여지없이 무릎을 꿇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를 통해서 지켜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굶주림에 ‘길들어져’ 가는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점차로 익숙해지고 곧 그것에 길들어진다. 배고픔의 감각도 원래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지고,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도 늘 듣던 말같이 느껴진다. 양심적이고 친절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양심을 버리고 품격을 지키지 못하는 일도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는 존재, 정신과 감정이 모두 멈춰버린 상태가 된다.   

   

지금 시대, 우리라고 다를까. 주인공처럼 배를 곯는 경험은 하지 않을지라도, 삶에서 우리를 길들이는 것은 늘 있는 법이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삶을 반복해서 사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속도와 결과만을 추구하는 이 메마른 세상에서 혹시 우리는 성공과 쾌락을 반복하고, 실패와 좌절에 길들어지며 그 결과로 오는 여러 감각에도 둔감해지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이 소설이 무겁게 환기하고 있는 바는, 배고픔을 견뎌내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비로소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려 한다는 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삶에서 나를 길들이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각성이며 그것에 무뎌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삶에서 나를 길들이는 익숙함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렇게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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