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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May 01. 2021

'어차피'가 주는 자유로움

내 안의 못난 나야, 꼭꼭 숨어라.


미국 가면 살게 될 줄 알았던 마당 있는 주택도 아닌 주제에 봄에는 바깥보다 추워 때 이른 냉방병을, 여름에는 제습기 물통을 하루 두 번은 비워야 하는 열대우림 체험을,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히터를 돌리지 않으면 냉골, 돌리면 냄새와 건조함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을 주었던 학교 기숙사. 카펫 청소기까지 사서 몇 번을 돌려대도 꿉꿉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카펫 바닥. 아침마다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푹 가라앉아 제 기능을 못하는 침대 매트리스. 고기 한 번 잘못 굽기만 해도 울려대는 파이어 알람에 애가 더 놀라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끝나는 곳. 백 년이 다 되어 가는 역사를 가진 기숙사는 세 살 아이와 함께 살기에 결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장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어차피'가 주는 자유로움. 어차피 내 집이 아니니까. 어차피 모두가 똑같이 생긴 기숙사에서 사니까. 어차피 학교에서 제공하는 가구, 가전이 필수옵션이라 재량껏 바꾸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거기에 우리는 하나의 어차피가 더 있었다. 어차피 2년 후에는 돌아갈 거니까. 


'어차피'라는 방어막 덕분에 기숙사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집 문은 꽤나 개방적이었다. 매일 같이 아이 영혼의 단짝 친구 가족과 집을 번갈아 오갔고, 생일이며 기념일을 핑계로 파티도 많았다. 번갈아 서로의 집에서 모임을 하는 가족들을 부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성당 구역 모임도 좁고 불편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치러냈다. 집이 엉망이어도, 대량 공급되는 기숙사용 가구들이 초라했어도, 아이들마저도 이 침대는 뭔가 불편하다 이야기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 집이 아니고, 어차피 우리는 2년만 있다 돌아가야 하니 부족한 뭔가를 사기에도 애매해 그냥 지내는 거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미국에서 열린 공간이었던 집을 경험한 아이는 아이다운 순수함으로 지금도 너무 쉽게 누군가를 초대한다. 미국에서는 덜 했지만,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 어렵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정 방문에도 기브 앤 테이크 원칙은 적용되는 거라서 방문 후 나의 공간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이 어렵다. 솔직해지자. 초대하기 싫다. 부끄러우니까. 


어릴 적부터 그랬다. 타인의 기분과 감정에 예민한 성격 탓에, 타인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으니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내내 전교 1등을 해도, 특목고에 갔어도, 계속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조기졸업을 했어도, 바깥에서 한 없이 당당했던 나는 집에 있어서만큼은 늘 한 없이 작아졌다.


아이가 새로 사귄 유치원 친구가 자꾸 초대를 한다. 지도 검색을 한다. 부동산 어플을 켠다. 와, 20억이 넘는 집이다.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뭐라도 사가야 하는데 어떤 걸 사야 하는지부터 머리가 아프다. 미안하지만 다음에요. 이번에는 또 다른 친구다. 언니, 우리 집 OO 동이예요, 놀러 와요. 부자동네다. 일단 초대를 보류하고, 아파트 이름을 듣기 전에 미리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둘러본다. 여기가 집 같은데? 한강이 거실에서 보이는 뷰의 집이라면? 추리를 해본다.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도 한심해 혀를 찼다. 와, 이 집은... 헉! 40억이 넘네? 이번에도 초대를 사양한다. 음, 다음에요.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본래도 돈 앞에서 작고 작았던 나의 자아는 소위 말하는 '빌거(빌라거지), 벼락거지' 처지가 된 요즘 먼지가 되어 소멸하기 직전이다. 내 안의 못난 나가 자격지심이라는 무기까지 들고 선두에 섰다. "더 상처 받기 전에 주인의 약한 멘털을 보호해!"






미국에 있는 2년 동안 어차피가 주는 자유로움 덕분에 내 안의 못난 나를 숨기고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어차피 기숙사에 살고 있고, 어차피 돌아갈 거니까 부러 모른 척했던 그들의 경제사정. 함께 지내며 자연스레 알게 된 한국 본가정의 상황은 당연히 넉넉할 수밖에. 회사 지원받아 온 우리와 달리, 그들 대부분이 꽤 어린 나이부터 오랜 시간 부모님의 도움으로 외국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숙사 사는 애들 중에 우리가 제일 가난할 걸? 하니 남편이 한 마디 더 거든다. "한국이었으면 걔네들 당신이 말도 못 섞어봤을 부잣집 따님 들일 수도 있어." 농담처럼 던졌지만 더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차피'라는 변명거리가 없었다면 내 안의 못난 나가 불쑥 튀어나왔을 만큼, 기숙사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초대도 사양했을 만큼 우리 사이의 경제적 격차는 컸다. 그러니 기숙사는 살기에는 불편한 곳이었지만, 못난 내가 더불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엄마로서 기도해 본다. 내 아이에게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기를. 아니 그보다도 '어차피' 뒤로 숨지 않는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으로 키울 수 있는 지혜를 내게 주시기를.



기숙사를 비우던 날 마지막 모습 기록,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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