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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Apr 05. 2021

미국 가면 마당 있는 주택에서 사는 줄 알았지

기숙사인가 수용소인가


작지만 하얀 울타리로 둘러 쌓인 마당이 있고,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을 주방 창문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집. 한시적 미국 살이지만 머물 곳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남편이 처음 바랐던 대로 미시간으로 갔더라면 어쩌면 가능했겠다. 대신 1년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겨울 동안 내내 마당 앞 눈을 치워야 했겠지만. 


2년 동안 머물 기숙사 문을 처음 열었을 때 우리 부부는 동시에 서로의 눈에서 실망과 좌절을 읽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식탁이 나오는 어이없는 구조나,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만큼 바란 칙칙한 카펫보다도 더 좌절스러웠던 건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퀴퀴한 습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만 넓어서 좋다고, 1층이니까 막 뛰어다녀도 된다며 신이 났다. 일단 저녁은 먹어야 하고, 잠은 자야 하니 짐들을 대충 풀고, 청소를 하고 고된 몸을 뉘었다. 지하실 같은 냄새와 습기의 원인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뽑기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지 방 하나의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물이 고이고 있었던 걸까? 책상을 가득 채운 물은 아래로 떨어져 바닥 카펫의 1/4은 적셔 두었다. 


관리실에 고지하니 원한다면 방을 바꿔도 된단다. 계단을 잘 오르내리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복층 형태의 2층 기숙사들은 안된다고. 1층은 어차피 바로 땅 위에 지어진 옛날 건물이라 모두 이렇게 눅눅할 거라고. 무엇보다 여기에 오기까지 이미 도합 여섯 번이나 짐을 싸고 풀고 하다 보니 더 이상은 싫다고.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서 2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누수 문제가 반복되고, 결국엔 살면서 붙박이장 다 뜯어내는 대규모 공사를 하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잘못된 결정. 한국에서 보낸 짐이 도착하기 전인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는데 말이다. 





전세가 없는 미국의 월 렌트비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비싸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생활비로 어지간한 뉴저지의 집세는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물세, 전기세, 인터넷 등등에 기본 가구, 가전 옵션이 포함된 학교 기숙사 가격은 스튜디오 타입의 방 하나를 빌리는 것보다 저렴했다. 누가 봐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정규 학기 시작 전 써머 세션 중에는 기숙사에 입소할 수 없다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말이다. 미국 렌털 시스템이니 가격이니 거래 방법이니 하는 것들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장 출국 한 달 전에 고작 한 달 반만 머무를 집을 구해야 하다니! 너무 막막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Missy USA에 문의 글을 올렸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혹시나 싶어 올린 글에 바로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심지어 학교 바로 옆 분위기 좋은 타운하우스의 2층 집이다. 아들, 딸이 모두 남편과 같은 학교에 다녀 자녀들 거주용으로 구입한 집. 딸이 잠시 외국에 나가게 되어 방 하나만 셰어 하는 형태로 렌트할까 고민 중이시란다. 이삿짐도 도착하기 전일 테니 가구와 가전은 물론 조리도구들 필요하면 조미료까지 다 그냥 이용해도 괜찮다고.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을 텐데 아들이 있으니 필요한 건 바로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방이 하나라 불편하겠지만 고작 한 달 반이다. 우리로서는 더없이 괜찮은 조건이었다. 하우스메이트를 맞아야 하는 아들도, 집 관리를 해야 하는 본인들도 한 달 반 정도 렌트해주고 살아보면 지속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운전면허 때문에 발이 묶여있었고, 모든 것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던 시기라 주택 생활의 묘미를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다. 아! 예상치 못했던 복병으로 신생아 때부터 잠에 예민했던 딸아이의 시차 적응 때문에 밤마다 옆 방 룸메이트 눈치 살피기도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청설모와 토끼가 집과 집 사이를 돌아다니고, 거실과 주방 창 밖으로는 온통 초록이 가득한 곳. 내 집 앞마당은 없지만 대신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과 놀이터, 테니스 코트가 있는 곳. 호숫가 언덕 위 하얀 집이 이웃인 자연친화적인 곳. 타운하우스 커뮤니티 행사에 소방차를 동원하는 스케일까지. 운전면허부터 아이의 잠투정, 남편과의 부딪힘 등등의 이유로 몇 번이고 귀국을 생각하다가도 나를 머무르게 한 곳. 첫 외국생활을 경험하는 남편이 아예 이민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우리의 첫 집. 


그런 집을 뒤로하고 도착한 기숙사의 첫인상은 처참할 수밖에 없었다. 





환하고 밝고 예쁘던 타운하우스를 떠나 낮에도 어두운 기숙사에 들어온 다음 날 

아이는 종일 창 밖만 보고 있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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