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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Sep 14. 2021

우리의 명절, 그들의 축제

얼싸 좋다~ 잘돌아간다~


"다른 건 모르겠고, 명절 안 챙겨도 되는 거 그건 진짜 부럽다." 독일로 5년간 주재원 생활을 가는 언니를 붙잡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 말을 내뱉었다. 사실 그 언니야 명절에 시댁 어른들과 친정 어른들이 함께 골프 여행을 가고, 언니네 가족 셋이 오붓하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터라 나의 부러움을 전혀 이해 못할 텐데도 말이다. 솔직히 까놓고 고백해 본다. 미국 생활 중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분명 시가가 가까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4번의 명절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보낼 수 있었던 건 '대한민국 며늘아기'에게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미국 도착 후 4개월 만에 맞이한 첫 번째 추석. 미국은 공휴일이 아니니 남편은 똑같이 학교 가고 일상도 그대로였지만, 명절 기분이라도 내자며 한인마트에서 잡채와 송편만 사다 맛나게 먹었다. 한국의 어른들께는 시간 맞춰 영상통화로 안부 인사면 충분했다. 이후 세 번의 명절은 한인성당이 한국에서보다 더 거하게 잘 챙겨줬다. 다 같이 모여 봉사자 분들이 준비하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아이들은 세배도 드리고. 맛있는 음식 먹고 사촌들과 놀 생각에 마냥 명절이 기다려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명절 스트레스? 그런 게 웬 말인가. 명절이면 좋든 싫든 물리도록 먹는 명절 음식마저도 타국에서 먹으니 그저 맛있고, 물론 명절 생각 않고 그냥 먹고 싶은 음식 나가 사 먹는 건 더 맛있었다. 



내가 먹고 싶은 잡채, 아이가 먹고 싶은 고추, 남편이 좋아하는 떡으로 차린 명절 밥상 & 추석 당일 친구와 외식



'명절에 한 번은 우리 집 먼저 가고, 한 번은 당신 집 먼저 가자'던 남편의 약속은 결혼 9년 차가 되는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절 스트레스가 결혼 후에야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집 떠나 살아왔고, 열아홉 대학생이 된 이후로 내가 지내는 곳과 고향집의 거리는 400km로 멀어졌다. 지금이야 KTX로 2시간 반이면 목포에 도착하지만, 내 고향 땅끝마을은 목포에서도 차로 또 40분이다. 그마저도 무궁화호나 고속버스로 일곱 시간은 꼬박 걸리던 20년 전에 비하면 감사한 일이지만. 


엄마품이 아직 그립던 대학생 때야 그래도 집에 가는 때만 손꼽아 기다렸다. 사회생활 막 시작하고 아직 말캉말캉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도 그랬다. 명절이면 민족 대이동 행렬에 자연스레 동참했다. 오가는 길이 지루해도 책을 읽거나 밀린 잠을 자거나 하면 시간은 금방이었다. 줄줄이 나 따라 서울로 올라온 동생들 포함해 왕복 차비만도 30만 원, 내려가 부모님 용돈 드리고 어쩌고 하면 돈 백은 우습게 나가기 시작하며 명절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건, 고향을 떠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졸면서 무한 로딩 기다리고서도 귀향, 귀경 티켓을 구하지 못하고 출근하는 날에는 참을 수 없는 피로함에 시달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참으로 간사하다. 고향은 좋아도 굳이 명절에 가는 건 기쁜 마음보다 피곤함이 앞서던 나였건만, 정작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내심 많이 억울했다. 나는 살아계신 내 할머니, 할아버지도 못 뵈러 가는데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조부모님을 위한 음식을 차려내고 기도를 드리고 있자면 아이러니함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어디 명절뿐이랴. 차로 여섯 시간 거리의 내 고향집은 일 년에 한두 번 연례행사처럼 가는 게 전부 이건만, 30분 거리 시가방문은 한 달에 두 번에서 많게는 네다섯 번도 너무나 당연하게 가는 일상. 친정이고 시가고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오기를 바라지도 않는 2년은 정말이지 자유로웠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할 지니. 우리의 명절보다는 그들의 명절, 그들의 축제를 그들의 방식으로 따라 해 보는 재미도 컸다. 중요 행사 중 하나인 독립기념일이 미국 도착한 지 4일 만에 있었다. 비록 우리 부부는 마트에서 시작된 부부싸움으로 냉전 중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미국 전역은 사방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한 껏 흥겨웠다. 우리 명절 추석이 조용히 지나가고 난 후, 10월부터 미국은 본격적으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핼러윈 다음은 추수감사절, 마지막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10,11,12월은 어느 곳을 가던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추석이나 설 한 달 전부터 명절 선물 광고들이 도배하는 것처럼, 핼러윈 준비에 한 달, 추수감사절 준비에 한 달, 크리스마스 준비에 한 달. 3개월을 꽉꽉 채운 흥겨운 분위기와 달뜬 설렘. 


한국에서 읽은 책에서 본 핼러윈을 우리보다도 세 살 아이가 훨씬 기대했다. 아이를 위해 핼러윈 퍼레이드를 찾아보고, 코스튬을 준비했다. 요즘이야 한국에서도 영어유치원, 영어학원 등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의 핼러윈 파티, 홍대나 이태원에서 이뤄지는 20대들의 핼러윈 파티가 있다지만 남편도 나도 핼러윈이라는 문화와는 아예 거리가 먼 세대다. 야심 차게 핼러윈 퍼레이드와 행사를 하는 프린스턴까지 갔는데,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프린스턴 대학교 밴드부가 만들어내는 선율은 흥겨웠고, 여기저기서 받은 군것질거리들 덕분에 아이는 몹시 행복해했다. 


어설프게 분위기만 느꼈던 첫 번째 핼러윈과 달리 두 번째 핼러윈은 제대로 즐겼다. 기숙사를 돌며 Trick or Treat도 하고, 농장에서 호박 하나 골라와 호박 랜턴도 만들고, 친구네 교회에서 하는 아이들을 위한 핼러윈 파티에도 가서 땀나도록 열심히 놀았다. 



프린스턴 대학교 학생들의 할로윈 퍼레이드 / Jack O Lantern / 한인교회의 할로윈 파티



첫 번째 추수감사절 역시 비슷하게 지나갔다. 미국인들에게야 최대 명절이라지만, 우리는 태어나 한 번 먹어본 적 없는 칠면조들이 가득한 마트 냉장고가 생경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저 학교가 쉬니 마음껏 놀자는 마음 정도였을까? 두 번째 추수감사절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도 들썩이는 미국 사람들의 분위기와는 달리 우리는 지인들과 만나서 맛있는 거나 먹자며 별다른 계획도 없었다. 그런 우리를 배려해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우리 가족들 모여서 땡스기빙 데이 저녁 식사할 건데 괜찮으면 와서 같이 먹을래요? 미국식 추수감사절 식사 안 해봤잖아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친구와,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와서 살다 혼자 남아 정착하게 된 친구의 남편.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날 모인 가족들 모두가 사실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덕분에 적당히 한국식 조리법이 가미되어 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더" 맛있었던 추수감사절 디너를 경험해 보았다. 미국이 기독교에 뿌리를 둔 나라라는 것을 그날의 식사를 통해 더없이 정확하게 경험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저 성격 좋은 친구 남편이었지만, 사실 친구 남편은 수백 명 신도를 가진 미국 교회 목사님이었으니 제대로 '미국식 추수감사절'을 경험한 셈이다. 








뭐니 뭐니 해도 미국 홀리데이의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다. 추수감사절만 지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전구를 내걸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하는 집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백화점과 몰은 온통 때 이른 크리스마스로 번쩍였고, 우편함에는 각종 광고 전단지들이 매일 같이 쌓였다. 크리스마스야 우리도 어릴 때부터 빼먹지 않고 챙겨 온 날이지만, '크리스마스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 2위인가에 링크되었다는 바로 그 뉴욕이 바로 옆이니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아직 뉴욕 포비아가 있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혼자서 뉴욕을 찾았다. 뉴욕에서도 핫한 브라이언트 파크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마켓. 커다란 트리 앞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마신 핫초코 한 잔의 낭만은 잊을 수가 없다. 비록 아무것도 사지는 않았지만, 설렘이 차고 넘치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그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게 했다. 다음 목적지는 크리스마스의 뉴욕을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 그 장소. 록펠러 센터 앞 초대형 트리와 saks fifth avenue의 라이트닝 쇼. 가는 길에 만난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 역시 외벽 전체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두어 유명한 곳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드디어 마주한 록펠러 센터 앞 트리와 화려한 라이트닝 쇼는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하는 나이지만, 기회만 있다면 언제고 꼭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혼자인 것이 아쉬워 잔뜩 담아 간 영상을 보고 나와 마찬가지로 뉴욕의 크리스마스에 반한 남편과 아이. 덕분에 셋이 함께 찾은, 우리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뉴욕의 크리스마스는 화려하면서도 따뜻했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크리스마스 마켓과 메이시스 백화점 크리스마스 장식
첫 번째 뉴욕의 크리스마스 / 두 번째 뉴욕의 크리스마스



뉴욕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뉴저지의 크리스마스도 역시 좋았다. 결혼 후 처음으로 산 크리스마스트리는 미국 사이즈에 맞게 12ft짜리 대형트리다. 일찌감치 꺼낸 크리스마스트리는 부러 새해가 밝고 나서도 한참을 두었다. 해도 잘 들지 않는 거실을 그나마 크리스마스트리가 밝게 채워줬으니까. 아이와 함께 진저 브레드 하우스도 만들고,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고 성당 공연 준비를 핑계로 매주 모여 신나게 크리스마스 전야의 날들을 즐겼다. 멀리까지 가지는 않아도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주택가를 찾아 구경도 하고, 롱우드 가든을 찾아 크리스마스 속 동화마을을 꿈결인 듯 둘러봤다. 


매일 같이 각종 크리스마스 광고 전단지가 도착하니 아이는 전단지를 보며 직접 원하는 선물을 골라두었다. 한국이었다면 어린이집에서 검은 머리에 홀쭉한 몸매를 가진 산타를 만나는 게 전부였을 테지만, 어느 몰을 가던 동화책 속 산타와 거의 흡사한 산타들과 사진 찍기가 가능하니 기념으로 사진도 남겼다. 아이는 아직도 사진 속 산타가 진짜 산타인 줄 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울듯 말듯한 표정의 동양인 여자아이가 무릎에 안기자, 아이보다도 더 당황스러워 보이던 산타의 표정은 우리만 알고 있는 추억이다. 



애써 울지 않는 아이와 산타 / 크리스마스 진저 브레드 하우스 / 롱우드 가든의 크리스마스






어디 연말의 세 달뿐이랴. 한국에서였다면 교회나 성당이 아니고서는 조용히 넘어갔을 부활절도 특히나 아이들에게는 큰 행사였다. 달걀 꾸미기와 에그 헌팅, 아이들을 위해 학교며 교회, 성당에서 진행되던 부활절 행사들. 부활절 관련 상품들만도 어찌나 많은지, 그 무렵 몰에라도 가면 눈이 휘둥그레져 구경하던 건 아이도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역마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부활절 행사도 시간대별로 나누어 봐야 할 정도로 많아서 골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다양한 부활절 행사들 (좌)지역 커뮤니티 / (우)대형 몰



각종 브랜드들도 앞다퉈 출시하는 부활절 관련 제품들



넘치도록 많은 성당 부활절 달걀들






추수감사절이나 독립기념일, 베테랑스 데이에 대부분 사람들이 들떠 있음에도 주로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학교 패밀리 기숙사는 항상 조용했었다. 남편과 농담처럼 우리나라 추석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태원에 모여 놀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가 꼭 그들과 비슷하지 않겠냐 이야기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의미 있고,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날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함께 공유해 본다는 것은 외국 생활의 장점들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비록 곁다리 이방인 생활일 뿐이라, 아니 어쩌면 여행하듯 지내는 한정된 기간 생활자라 다시없을 것처럼 열성적으로 즐겼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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