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있는 글부터 쓰기로 했습니다.
1.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작가의 꿈을 아직 놓지 못했습니다.
계기는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해 내는 데 있어서만큼은 내 머리를 내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기억하는 일을 나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계기로 작가가 되고 싶다 장래희망란에 적었는지는 그 시절의 나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지요.
이해력도 빠르고 습득력도 좋은 편이라 어려서부터 제법 많은 분야에서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살았습니다. 게 중 어느 하나 '제대로 잘' 하는 건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처절하게 깨닫고 있지만요. 여하간 글쓰기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말도 빨랐고, 글도 다섯 살에 혼자 뗐고, 책도 많이 읽던 똑똑한 아이였으니 또래들 중 제법 괜찮아 보이는 글을 썼겠지요. 몇 개의 글들에 칭찬이 따라왔고, 칭찬에 자극을 많이 받는 성격이다 보니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국민학교 5학년, 아니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래희망란에 '작가'가 꽤 오랫동안 적혀 있었던 듯합니다. 자꾸 반복해 '작가가 되고 싶다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작가로 마인드 세팅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나는 아직 작가의 꿈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2. 모든 것이 브런치 때문
작가의 서랍을 열어 봅니다. 폰에 저장된 쓸거리 목록만큼이나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쭙잖은 소설부터 시작해 매거진으로 쓰고 있는 미국 생활 에세이, 안데르센 공모전 글, 제목도 붙이지 못한 채 생각나는 부분만 일단 시작한 글들. 이 모든 것이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사람인지, 어떤 글을 쓸 수 있는지 제대로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덜컥 브런치 작가에 선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슬그머니 원망의 화살을 돌리고 싶어 집니다. 사실 브런치 작가 지원할 때 곁다리 미국 생활에 대해 기록하겠다고 했으니 그걸 믿고 나를 선정해 준 브런치팀을 원망할 계제는 아니지만요.
글쓰기를 놓지 않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상 기록과 여행 정보를 남기는 글 정도만 쓰고 지낸 지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 다독은 제1 필요조건과도 다름없건만 결혼 후의 나는 책도 간간히 겨우 읽어내는 정도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너무 잘 알면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 마음 편한 이유를 제 멋대로 붙여 버렸습니다.
그런 주제에 별다른 준비도, 거창한 무엇도 없이 덜컥 한 번에 브런치 작가에 합격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한 걸음이 어린 시절 작가라는 꿈을 갖게 만들었던 주위 어른들의 칭찬보다도 훨씬 강력한 불을 지폈습니다.
2021년 3월 25일 작가 선정 후, 지원할 때 작성했던 3개의 글들을 차례로 올렸습니다. 그 중 하나가 떡하니 다음과 브런치 메인에 오르더니 어마어마한 알람을 보내 댑니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5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다섯 번이나 별 것 없는 글이 메인에 올라 많이 읽혔습니다. 정말로 많이 읽히기만 했습니다. 도통 반응이 없어 끝까지 읽은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의심도 되고, 제목에 혹해서 들어왔다 글이 별로라 조용히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 건 아닐까 슬퍼지고는 했으니까요.
이제는 압니다. 브런치 신입 작가들의 글이 메인에 많이 오른다는 것도(물론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음이나 카카오탭 등에 노출되는 글은 글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글이 다루는 주제의 영향이 크다는(물론 주제도 글도 너무나 훌륭한 글도 많습니다) 것도요. 브런치 알람을 끄고 지낸지는 한참 됐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없이 잔잔하기만 한 방문자 그래프보다는 이런 굴곡이 좋기는 합니다.
3. 주는 떡도 못 받아 먹는다.
브런치를 갓 시작하고 막 썸 타기 시작한 연인처럼 브런치의 모든 반응에 한참 예민해져 있을 때였습니다. 브런치 메인 선정이 '내 글이 나쁘지는 않은가보다' 그간 목말라 있던 인정 심리를 채워줬다면, '어라랏, 이건 말도 안 되잖아! 그 정도라고?' 콧대 으쓱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회수와 좋아요 알람이 아닌 제안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무려 출간 제안입니다.
남편과 동생에게 어떡하지 어떡하지 호들갑을 떨면서도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3월 25일 브런치 시작, 4월 13일 출간 제안이라니요. 정말이었습니다. 비록 전자책이라지만 누군가가 내 글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메일을 읽으며 설레지 않을 작가 지망생이 과연 있을까요?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은 정말이었습니다. 종이책을 출간해 본 친구의 조언을 받아 보았지만, 사실 이런저런 조건들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그때의 나에게는 브런치 작가 지원하며 썼던 글 3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대충 소재만 적어둔 메모장이 다였으니까요. 출판사 대표님은 내 시간에 맞추어 천천히 작업해 초안을 마련하며 같이 진행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설레었던 출간 제안은 흐지부지 되고야 말았습니다.
4. 나도, 에세이스트라고?
초반의 러시와는 다르게 브런치는 곧 잠잠해졌습니다. 공들여 쓴 글은 읽히지 않았고 현생이 바쁘다는 핑계로 글쓰기에 다시 소홀해졌어요. 나에게 브런치를 상기시켜줬던 동생이 또 다른 채널을 알려줍니다. 월간 단위로 주어진 주제에 맞는 에세이를 짧게 200자 원고지 10매 내외로 작성하면 된다고 합니다. 수상혜택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에세이 작가의 심사평이었습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 심지어 그것도 베스트셀러를 몇 권씩 낸 작가가 내 글에 대한 의견을 준다니요. 도전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초심자의 운이라는 게 있다는데, 브런치에서 다 써 버린 건 아닌가 싶었던 나의 운이 이번에도 통했나 봅니다. 도전 첫 달 우수상, 연달아 둘째 달도 우수상에 적힌 내 아이디를 보며 뿌듯하면서도 마냥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내심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은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쓰고는 싶은데 써지지는 않으니 매일 머릿속이 어지러웠습니다. 풀리지 않는 소설 대신 다른 글들을 쓰면서도 마음은 흡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작가의 서랍' 속 소설들을 들락날락거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하나같이 어떤 한 관계, 그런 관계를 만든 과거의 어느 사건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은 모두 우울한 사고방식, 즉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인 '반추 - 안 좋은 기억이나 생각을 자꾸 떠올리며 곱씹는 버릇'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반추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반추의 결과를 예상해보기, 반추적 사고로부터 주의 분산하기, 기분을 항상 좋게 유지하기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겠다면서 반추적 사로고 매일 같이 나를 부러 밀어 넣고 있었으니 힘이 들 수밖에요. 아직 그 관계는 나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관계 속 사건은 '우리 관계를 위해 없었던 일처럼 지내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고요. 글은커녕 주위에 말로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소설 속에서 내가 아닌 척 풀어내고 싶었던가 봅니다. 나의 무의식은요.
글쓰기를 통해 치유받았다는 경험담은 많습니다. 글 쓸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힘 빼고 가볍게 쓰기라는 조언 또한 차고 넘치지요. 쓰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안 좋은 기억으로 무겁게 끄집어 내리는 글은 좋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쓸 수 있는 글부터 쓰기로 했습니다.
내가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은 에세이입니다. 여행 에세이를 출간해 보자는 제안도 받았으니 에세이스트가 맞겠지요. 나도, 에세이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니 나도! 에세이스트가 맞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내 에세이에 대한 심사평을 곱씹어 읽어 봅니다. 형식상 보완할 점 대신 내용에 대한 부분만 적힌 심사평을 보며, 그래도 내가 글쓰기에 대한 기본기는 다행히 나쁘지 않은가 보다 위안해 봅니다. 그렇게 작은 용기 얻어 또 하나의 에세이를 완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