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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Aug 25. 2021

할아버지, 그건 훔쳐가면 안 되죠.

이 나쁜 도둑놈아


새벽 4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생각도 없이 온 몸으로 내보이며 공항버스에 올랐다. 스물여섯의 칠 월. 해외여행이 처음도 아니면서 유난히 떨렸던 건, 매번 아시아 대륙 어디쯤이던 목적지가 처음으로 유럽 대륙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 비가 온다는 예보에 걱정했는데 비행기 날개 아래로 보이는 하늘은 더없이 맑아 기운이 났다. 샤롤 드골 공항에서 RER을 타고 파리 북역으로. 그러고도 두 번을 더 갈아타고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파리 숙소는 12호선 종점. 


피곤함을 추스를 새도 없이 에펠탑 야경을 보러 간다는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덕분에 나에게 다가온 파리의 첫 번째 이미지는 '그거 하나만 보러 다시 가도 좋을 만큼' 너무나 예뻤던 에펠탑이 되었다. 같이 간 일행들은 에펠탑에 올라가 파리 시내 야경을 본다고 했다. 에펠탑 없는 파리 야경은 팥 없는 찐빵이라 주장하며 나는 다리 건너 사요 궁으로 향했다. 장시간 비행의 피로 따위는 에펠 매직에 사르르 녹아버렸다. 야경에 취해 파리의 밤 분위기에 취해 넋 놓고 에펠탑만 한 없이 바라보는데 같이 간 동생이 어깨를 툭툭 친다. "언니, 파리에 소매치기랑 도둑 많다는 이야기 들었죠? 우리 숙소에 한 명도 카메라 도둑맞았대요. 언니 카메라 좋은 거잖아. 얼른 가요."


다음 날엔 시차 때문에 새벽 6시에 눈이 떠졌다. 둘째 날은 파리의 중심부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개선문은 새로운 것으로부터, 미술관은 오래된 것으로부터'가 나름 이 날의 컨셉이었다. 라데팡스에서 에투알 개선문을 지나 카루젤 개선문까지 가다, 샹젤리제 거리도 살짝 훑었다. 유럽은 역시 하늘도 다르구나, 말도 안 되는 하늘 사대주의가 생길 만큼 완벽한 날씨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뮤지엄 패스를 당당하게 내밀고, 미리 담아간 MP3 가이드를 재생했다. '3시간만에 루브르 완벽 감상하기'였던가? 그간 미술관 한 번 제대로 가보지 않은 미술 문외한이었던터라 가이드 따라 볼 건 다 봤다며 의기양양하게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루브르 밖으로 나오면 바로 튀일리 정원이다. 구름을 스쳐 찬찬히 돌고 있는 관람차,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둘러 쌓인 초록 잔디 정원. 매트도 없이 그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읽거나 병째로 와인을 들고 마시는 파리지앵들. 오늘치 일정의 3분의 2는 소화했고, 이제 잠깐 쉬었다 개선문 야경만 보면 된다. 만족감과 안도감에 취해 나도 마치 파리지앵이 된 것처럼 잠시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벤치에 앉아 종일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DSLR을 내려뒀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다 갑자기 만 보는 훌쩍 넘게 걸으니 놀란 발도, 잠깐 파리 공기 좀 쐬라고 꺼내어 주었다. 이러려고 돈을 버는구나, 역시 오길 잘했어 몽글몽글 가슴이 간질거렸다.


"봉쥬흐, 마드모아젤" 불쑥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꼼지락거리던 발가락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성성한 백발에 보통보다 조금 더 나온 뱃살을 가진 프랑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카메라를 슬쩍 밀치고 옆으로 앉았다. 카메라 도둑인가 싶어 움찔 카메라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카메라를 꼭 쥔 내 손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영어로 말을 건넨다. 유창하지 않은 그의 영어는 간신히 뜻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나는 파리를 사랑한다. 파리에 온 외국인들이 고맙다.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너에게 아름다운 파리를 소개해 주고 싶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아직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은 채 발로 땅을 더듬어 신발에 발을 꿰어 넣었다.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한 거다. "바쁜 일이 있다면 가봐도 좋아. 만나서 반가웠어."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는 선선히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그만 마음을 놓아버렸다. "어, 나도 반가웠어요." 오해를 한 게 미안해져 어색하게 인사하며 슬쩍 일어섰다. 


"프랑스식 인사를 알려줄 테니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을래?"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비집고 들어온 그에게 호의를 베풀 이유는 없었지만, 나는 제법 여행을 잘 해내고 있다 한껏 자신만만해 있던 상태였다. 인사쯤이야 뭐. 다시 의자에 앉은 건 내 선택이었다. 그의 볼이 내 볼 옆을 스쳤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그를 따라 어색하게 입으로 소리를 내었다. 쪽. 서둘러 볼을 떼어 내는데 어느새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잡고 있다. 쪽. 미처 피하지 못했다. 이번에 그의 입술이 향한 곳은 볼이 아닌 입술이었다. 


한껏 만족감에 취해있던 파리 여행자에서, 한심한 얼뜨기 관광객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더 억울했던 건 화를 냈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당황한 나머지 내가 먼저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늘 근처를 떠돌며 나 같은 얼뜨기들을 노리고 있었을 테다. 입술이야 닳는 것도 아니라지만, 억울함으로 몸이 떨렸다. 이제 고작 여행 이틀째일 뿐인데, 앞으로 만날 모든 현지인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억울했다. 에펠탑과 개선문, 루브르의 멋진 작품들로 채워진 파리의 이미지를 도둑맞은 것이 억울했다. 무엇보다 바보가 된 기분은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여행 중에도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12년이 되도록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억울함을 이제야 풀어본다. 할아버지, 당신이 훔쳐간 건 그냥 입술이 아니라 한 여행자의 소중한 시간과 추억이에요. 그건 훔쳐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5분 파리지앵이었다가 졸지에 얼뜨기 관광객이 되어버린 그 곳. 튀일리 정원과 카루젤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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