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가고, 사랑이 오다.
택시 안, 어두운 뒷좌석. 여자는 취한 척 머리를 툭 남자의 어깨에 기댔고, 남자는 여자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여자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 입구 세워진 트럭에 기대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포개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손을 잡고 나란히 걷다 입을 맞추었다 또 걸었다. 급할 이유는 없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지만 이내 여자의 집 앞이었다.
아저씨가 벽을 칠했나 보네. 유난히 가로등 빛을 받은 흰 담벼락이 밝다. 남자는 빛 따위 개의치 않았다. 가로등에 기대어 선 여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남자의 입술이 또다시 여자에게 다가온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날 줄 모르는 듯 입맞춤은 이어졌다. 남자가 돌아서지 못한 이유는 아쉬움이었겠지만, 여자의 경우는 제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파란 대문을 열고 작은 마당을 지나 계단을 두 칸 내려가는 여자의 반지하 집. 남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마당에 있어볼까, 2층이 집인 양 올라가 기다릴까 남자에 맞춰 혀를 움직이면서도 여자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3년을 만난 첫 남자 친구와 헤어진 곳도 바로 그 파란 대문 앞이었다. 둘이 처음 헤어졌을 때처럼 몇 날 며칠을 울고만 있지는 않았다. 슬픔에 잠겨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또한 대학생만이 가질 수 있는 낭만이라 둘러댈 수 있었던 22살의 이별이 아니었으니까. 헤어진 다음날도 너무 울어 깨질듯한 머리를 감싸 안고 출근을 해야 했다. 만나는 내내 내가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라 생각했는데, 최선을 다해 사랑한 나보다 못해준 게 많아 아쉬운 쪽은 남자 친구였다. 끝없이 미련을 보이며 연락하는 그를 포기하게끔 한 건 "당신 때문에 지금 내 옆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싫어."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인생의 황금기를 이성들로부터의 관심과 애정을 가장 많이 받은 때라고 정의한다면, 단연코 나의 황금기는 파란 대문 집에 살던 때였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던 첫 연인과 헤어짐도 있었지만 이내 넘치도록 많은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아직까지도 인생 최고의 키스로 기억되는 진한 키스를 선물한 남자의 고백, 소개팅은 나가는 족족 성공률 100%, 입사 동기들과 - 한 명이 아니다 - 의 썸 아닌 썸. 수많은 남자들 중 그 당시의 내가 선택한 사람은 나의 초라한 반지하집을 보여주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한 곳이라 그 모든 남자들은 결국 파란 대문 안쪽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동생의 첫 서울 집이었던 파란 대문 집은 동생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를 살고 있는 언니와의 시간으로 기억되는 듯했다. 내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따로 살았으니, 고등학교 3년에 서울에서의 5년. 자그마치 8년의 간극이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지방에서 갓 상경한 새내기 대학생과 슬슬 사회의 쓴 맛을 알아가고 있는 신입사원. 자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던 두 여자가 서로 맞춰가며 웃고 울었던 기억을 파란 대문 집은 모두 품고 있다. 우리는 종종 건대 호숫가를 돌며 자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원가족의 문제들을 나누었고, 동생과 함께 살며 생활비 모두를 책임지는 언니에게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대학가의 술집에서 잔을 부딪히기도 했다.
언니는 동생의 시험기간에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먹이고 동생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숨죽이고 앉아 있곤 했다. 권해오는 술잔을 거부하지 못해 잔뜩 취해 들어온 언니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면서도 다음 날 꿀물 한 잔 내미는 건 동생의 배려였다. 각자가 속한 세계는 달랐지만, 자매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생활 습관을 맞춰가는 데야 물론 사소한 부딪힘은 있었지만 둘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 덕에 쉬이 극복했다. 무엇보다 우리를 연결시켜 준 건 심리학적 이해였다. 동생도 나처럼, 어쩌면 나의 영향으로 심리학을 복수 전공으로 선택했다. 부연 설명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동시에 객관화시켜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서로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동생과 공유할 수 없었던 영역도 있었다. 특히 파란 대문 집이 서울에서 갖는 경제적 위치 혹은 그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컸다. 방에는 이층 침대가 두 개,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 동생이 살다 온 기숙사보다는 이층 침대 개수도 하나로 줄고, 마음껏 써도 되는 욕실에 작지만 공부방으로 쓸만한 공간까지 있는 집이었다. 서울 사는 친구의 예쁘게 꾸며진 방이 가끔 욕심나기는 했어도 동생에게 파란 대문 집은 상경 후 첫 집으로는 제법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얼굴 몇 번 보지도 않은 오촌 고모의 전세방에 얹혀 시작한 나의 첫 서울생활보다야 백 배 나을 테니 솔직히 조금쯤은 동생이 부럽기도 했었다.
고모의 침대 옆에 이불 한 채 더해 시작한 서울살이는 원래 창고였던 곳을 개조한 두 번째 집으로, 그리고 쪽방촌의 창문 하나 없는 방으로 이어졌다. 네 번째인 파란 대문 집의 주소는 '자양동 OO 번지 반지층'. 연립 건물이 아닌 2층 주택을 이리저리 나누어 세를 놓은 터라 주소에서부터 입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던 집. 세탁기는 집 안이 아닌 바깥 계단참에 두어야 했고, 문을 열자마자 작은 가스레인지 하나 놓인 주방이라 가끔 요리라도 하려면 현관문을 열어두어야만 했던 집. 이층 침대를 놓기엔 천장이 낮은 반지하방이라 2층을 쓰던 동생은 번번이 천장 박치기로 아침을 시작하던 집.
그럼에도 방에는 그렇게 원하던 큰 창문도 있고, 그 창문을 걱정 없이 열어둘 수 있어 좋았다. 해 잘 드는 마당에 가끔 이불을 말릴 수 있는 것도 감사했고, 집에 들어갈 때마다 주위에 노숙인이나 위험한 사람은 없는지 살피지 않아도 되어 안심했다. 주인집은 바로 위에 살았지만 딱히 간섭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존재만으로도 든든했고, 추가로 딸린 작은 방까지 있었으니 흡족할 법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갓 상경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회식 끝에 택시를 잡을 때면 어디 살아? 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이었다. 신입사원 교육 업무를 맡은 덕에 주소를 확인하는 일도 흔했는데 좋은 동네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은지. 회식 후에는 대충 건대입구요 하고 지하철역 근처에서 내려서 걸으면 되고, 좋은 데 사는 것보다 부모님 품에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을 더 부러워하고는 잊어버렸다. 문제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남자들이 예상치 않게 많아져 버렸다는 것. 반지하에 살던 그녀는 어쨌든 잘 나갔고, 잘 나갔기에 속상해지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