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럼의 다양성
"그런데 00이 진단은 받았어요?"
최근에 친해진 같은 아파트 엄마가 묻는다.
그쪽도 느린 아이를 키우고 있어, 절박함이 느껴지는 질문이다.
"네, 진단받았어요. 자폐로요...^^"
"아 그래요?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작년 6월의 어느 월요일,
새벽부터 분주했다.
국내 최고의 소아정신과 전문의, 특히 자폐 아이는 걸음걸이만 봐도 알아차린다는 그분.
1년 반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분에게 아이를 선보이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이라 차도 막힐 테고, 힘들어할 아이를 위한 간식과 장난감도 챙겼다.
당시 아이는 여섯 살,
가장 걱정했던 언어가 정말 좋아졌다. 서툴지만 문장 구사는 물론 질문,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고무적인 건, 전에는 잘 안 하던 눈 맞춤이 늘었다는 것. 본인이 질문한 후 대답을 잘 듣기 위해 눈 맞춤을 하는 것 같았다. 유치원 특수반 생활에서도 긍정적 피드백을 들었다. 어쩌면 자폐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 반, 두려움 반을 안고 출발했다.
그즈음 아이는 엘리베이터에 완전히 꽂혀 있었다. 예약시간에 딱 맞춰 아슬아슬하게 도착. 병원 엘리베이터를 충분히 타지 못한 채 진료실에 들어간 아이는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특이하게 진료실마다 앞에 커다란 숫자가 써져 있었는데, 아이가 다니던 아동 발달센터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아이는 은연중에 저 숫자가 적힌 방에 들어가면 장난감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원래는 소아정신과 진료실에는 아이의 놀이 관찰을 위해 장난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진료실의 장난감은 싹 치워진 상태, 입장 하자마자 장난감 없음에 실망한 아들, 진료실은 흥미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진료실 입장)
"안녕하세요."
유명한 의사 선생님보다는 진료실의 구조, 특히 뒤편에 있는 작은 문에 가장 먼저 시선이 꽂힌 아이. 당연히 인사를 잘 할리 없다.
"00아, 무슨 유치원 다녀?"
"00 유치원"
앗 다행히 제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의사 선생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그리고 진료실 뒤편 문의 정체가 궁금했던 아이는 계속 나에게 질문했다.
"저 문을 열면 뭐가 나오는 거야?" x (무한 반복)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이 이어지기 힘들 정도로 계속 질문하는 아이에게 최대한 차분히 대답해 줬다.
"00아, 엄마가 선생님이랑 이야기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이어지는 의사 선생님의 감탄하는 표정, 감탄의 대상은 아이가 아닌 나였다.
"어머님. 혹시 전에 무슨 일하셨어요? 말씀을 너무 상냥하고 차분하게 잘하시네요. ABA(행동치료) 엄마가 배워서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뒤 이어 내려지는 아이에 대한 말씀.
"ASD(Autism Spectrum Disorders, 자폐스펙트럼 장애)의 양상이 보이네요."
무심한 엄마라고 혼나더라도 아이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진료실을 나온 후 남편은 화를 냈다.
"우리 애가 제대로 잘 대답했는데 왜 자폐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아이가 "몰라”라고 대답했어도, 선생님 눈만 제대로 쳐다봤으면 됐었다는 걸. 자폐가 주력 분야인 국내 몇 안 되는 전문의들도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우리가 만약 자폐 진단을 쉽게 내리지 않는 병원에만 갔고, 그 진단을 100% 신뢰했다면, 나는 우리 애가 자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어려움이 존재하는 아이기에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난 오로지 아이를 제대로 잘 이해하길 원했고, 진단을 받은 것에 후회는 없다.
물론 그동안 아이의 증상에 관한 다른 의견들도 들었다.
"걱정 마세요. 00 이는 단지 특별한 아이일 뿐입니다." - 소아과 전문의 1
"수줍은 성격인데 자폐 증상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 소아과 전문의 2
"제 경력이 16년인데요, 한 번도 00 이가 자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 아동 발달센터 원장
"말을 그 정도로 한다고요? 그럼 자폐 아닙니다. 불안 수준이 높은 아이예요." - 한의대 병원 신경과 원장
이렇듯 자폐이다/아니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최근 '프리즌 브레이크'로 한국에서도 사랑받은 배우 웬트워스 밀러(49)가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석호필의 자폐 커밍아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아했을 듯하다. 엥? 저렇게 연기도 잘하고... 멀쩡해 보이는데 자폐라고?? 그렇다. 자폐스펙트럼이란 이토록 다양한 것이었다.
스펙트럼- 빛을 받으면 다양한 색을 내는 것.
그것처럼 자폐는 정말 다양한 색을 낸다. 주변의 자폐 아이들이 몇 있는데 모두 다 다르다. 말은 잘 못하지만 한글을 네 살 때 스스로 익힌 아이, 아직 의사소통이 어려운 아이, 말은 잘하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 그만큼 경증에서 중증까지, 증상들도 매우 다양하다. 자폐 진단의 척도가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의사소통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제한적이고 반복된 관심사이다. 그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내 아이는 자폐 스펙트럼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7살이 된 아이는 많이 자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자연스러웠던 말투가 자연스러워졌다. 한글도 제법 읽고 쓰며, 특히 수학 연산에 강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고 애교와 스킨십이 많다. 하지만 아직 가족 이외의 타인과의 눈 맞춤을 불편해하고, 집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하나를 다 듣고 있을 만큼 예민하다. 잠을 푹 못 자고 새벽에 자주 깨는 건 여전하다.
처음에는 아이가 제발 자폐는 아니길 바랐다. 초등 입학 전까지는 최대한 평범해지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땐 내가 생각이 좀 모자랐던 것 같다. 특별한 아이가 평범해 지길 바라다니. 이제는 자폐이든 아니든 행복한 아이로 키우는 게 목표이다. 사실 자폐는 매력적인 것 같다. 약간 다른 별? 에서 온 느낌이 들거든. 그들은 틀린 게 아니라 뇌구조나 감각,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것뿐이다. 아이의 놀라운 기억력이나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볼 때면 감탄사가 나올 때도 많다. 부모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 "천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자폐 스펙트럼 안에 아이가 속해있다면, 거기에 맞게 특별하게 키워야겠지.
자폐이든 아니든 사랑스러운 내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