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의 일기장
"띵동 띵동"
"안 안.. 녕녕.. 하하 세요.. 먼지 청부 살인에서 나왔습니다!!"
몇 번의 벨소리가 들렸을까?
"늘"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하얀 작업복을 입은 여자가 주뼛주뼛 거리며 서 있었다."늘"은 첫눈에 그녀가 그림자가 말하던 거의 죽어가는 수진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온몸이 하얀색 위생용품으로 가득 덮여 있는 모습과 상반되게 양손에는 있어야 할 하얀 위생장갑의 자리에 햇볕에 거뭇거뭇하게 탄 열 손가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스크 안에서 어색하게 웃음 짓고 있는 수진의 모습에 "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살가운 목소리로 환영한다.
"아 수진 씨죠? 어서 오세요.."
"네.. 안.. 안녕하세요."
"어색해하시지 말고 들어오세요. 수진 씨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지문도 남기지 않고 청소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누. 누.. 누가... 그런 이야기를 … 하긴 그렇긴 하죠 저는 지문이 없으니까.."
"누가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수진 씨가 제 집을 청소해 주는 게 중요하죠 저는 나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청소하세요."
"아니 저는 한다고.. 안 했는데.. 저는 그냥 누가 저를 추천했는지 물어보려고 온 건데요."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준비는 다 하고 오신 것 같은데요?"
"늘"은 물끄러미 수진의 차림새를 훑는 듯한 자세로 쳐다봤다. 수진은 당황해하며 먼지 청부 살인 업체 사장님이 이러고 가야 한다고 신시 당부를 했다며 얼버무렸다. 그 모습에 "늘"은 얼른 자신의 발을 운동화를 구겨 넣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준비하고 온 게 아깝잖아요. 하루 아르바이트한다고 생각하고 해 봐요. 청소 다 되면 전화해 주세요. 혹시 알아요 적성에 맞을지?"
분명 "늘"은 삐꺽삐꺽 거리는 로봇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당황한 수진은 그 연기를 눈치를 채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청소를 하게 되면 시간당 3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늘"이 빠져나가는 길을 막지 못하게 되었고, "늘"이 나가고 나서야 "늘" 뒤에 가려졌던 돼지우리처럼 입었던 옷들과 종이들이 어우러져 있는 쓰레기 처리장 같은 모습이 펼쳐지면서 그제야 왜 시급이 3만 원인지 이해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쨌든 자신의 몸이 완전무장됐으니, 정신도 이제는 완전 무장하고 그냥 해보자라는 생각이 불현듯 수진의 발을 붙잡았다.
마치 카오스 같은 곳에서 수진은 눈을 질끈 감고 첫발을 내디뎠다.
정신을 완정무장해서였을까?
아까는 쓰레기 소굴 같았던 이곳에서 물건들을 하나를 들어서 치울 때마다 자신의 손에 박혔던 굳은살들이 손톱깎이로 깎아 사라지는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마치 남의 의견의 억지로 동조하며 따라가던 자신의 침묵들이 어느새 온몸 구석구석 굳은살이 되어 박혀 버린 줄 알았는데, 막상 자신이 "늘"의 방에 있던 쓰레기를 치우려고 손안에 잔뜩 움켜쥐고 있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기 증명의 두려움과 공포들을 놓아버린 순간, 우연히 보게 된 자신의 손 한가운데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실핏줄들과 무수히 많은 줄들이 쳐져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이 지문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채 숨기기 위해 손을 움켜쥐었던 것들이 굳은살처럼 켭켭히 쌓은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와 같은 것을 도미노처럼 쌓고만 있었다는 사실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난 지문이 없는 게 아니었어! 굳은살에 덮여있었던 거야. 손톱을 깍듯 청소를 하면서 깎아내면 되는 거였어!”
그 순간, 수진 자신도 자신이 쌓은 도미노들이 찰나의 깨달음으로 인한 손짓에 의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쉬웠던 것을 그동안 정말 힘들게 껴앉고 있었구나... 내가 쌓은 굳은살들에 묻혀서.. 바보처럼"
"늘"은 어색한 연기를 하고 나왔지만, 정말 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강아지처럼 주연의 집 주변을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뜩 자신의 집 창문을 봤는데 엉덩이 춤을 추는 수진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엄지 척을 만들어 보냈다. 순간 너무 행복해 보이는 그 그림자의 모습을 보자 자신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에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늘"은 3시간 정도 지났을 때 수진에게 청소가 다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집에 돌아가 수진의 얼굴을 봤을 때 "늘"은 놀라고 말았다. 수진의 얼굴은 그을린 자국 투성이었지만, 집에 들어왔을 때 느껴졌던 어두웠던 느낌은 어느새 사라지고 무언가에 해방된 듯한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남색 다이어리가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늘"에게 그 일기장을 건네며 말했다.
"소파 구석에서 찾았어요."
물끄러미 바라본 남색 다이어리에 "늘 주연인 주연의 일기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일기장을 보니 어릴 때 주연의 일기장을 몰래 읽으려고 하다가 맞은 기억들이 "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릴 때부터 그 일기장에는 금색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저 자물쇠만 없었어도 주연의 일기장을 열 수 있었을 텐 데라는 생각에 "늘"은 그 자물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눈치챈 수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일기장 비밀번호가 0909죠? 저는 지문이 많이 찍힌 곳을 잘 찾거든요. 지문이 없다 보니 지문 찾는 게 습관이 되었달까? 그런데 비밀번호가 너무 쉬워요. 이 참에 바꾸세요."
"아.."
수진은 주연의 일기장이 "늘"의 것인 줄 알고 자신이 첫 고객의 추억의 상자를 찾아주었다는 뿌듯함으로 빤히 "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늘"은 자신의 일기장이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식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보라색 주연의 지갑에 있던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수진은 그 돈을 받고 마치 자신의 적성을 이제야 찾았다는 듯 손에 들고 소중한 신줏단지 모시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들고나갔다."늘"은 수진이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깊은숨을 들이쉬며 조심스럽게 수진이 알려준 일기장의 비밀번호를 돌렸다.
'0909' 글이 사라진 날짜 그리고 늘의 생일.. 그게 일기장의 비밀번호였다니...'
딸깍딸깍 딱!
0909 숫자를 돌리자마자 탁 하고 무언가 맞혀진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자물쇠가 열렸다. "늘"은 황급히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황급히 돌아가는 늘의 눈은 갑자기 한 지점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쓰인 한 문장이 있었다. "늘"은 숨죽여 그 문장을 읽어보았다.
"나... 나 때문에.. "늘"이 죽은 것 같아 아니 내가 "늘"을 죽였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문장들로 가득한 일기장에는 그동안 주연의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자책감이라는 어둠에 빠져 그녀의 몸도 마음도 망가져가고 있는 모습이 늘의 눈에 그려졌다.
"왜 김 대표는 주연이 이렇게 되어 가는 동안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나를 기만한 건가!"
그렇게 늘은 주연의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김 대표에 대한 증오가 끓어올라 넘칠 것 같아졌다. 그리고 "늘"은 가능한 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그림자 세상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기장을 읽는 내내 가득 채워진 김 대표에 대한 질문들이 나중에는 자신을 향한 화살로 돌아올 것 만 같았다. 하지만 "늘"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 모든 일들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그리고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