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고쳐 쓰는 거 아니다.
김 과장과 상의했던 나 자신을 위한 휴가는 대리로 승진한 후 세 달이 지난 후에나 떠날 수 있었다.
떠나요~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제주도의 푸른 밤이라는 노래를 미친 듯이 부르며 남편과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그곳에서의 휴가는 마치 미친개로 쉼 없이 짖어대던 나에게 주는 산책 같은 휴가였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또 언제 이런 산책을 또 갈 수 있겠어?라는 생각에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잠잘 시간도 아깝다 더 놀아야지!!”라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어느 날은 미친 듯이 날뛰는 나를 붙잡고 차에 태워 남편은 제주도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아마도 그런 나의 모습이 남편에게는 쉼이 아닌 이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까 봐 미쳐서 날 뛰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가서야 울창한 나무들의 냄새들에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나에게 필요했던 숨들을 쉬자 그제야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풍경들 속에는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있었다.
작은 나무들은 강한 바람에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이미 훌쩍 커버린 나무들은 바람이 아무리 심하게 불어도 그 바람을 여유 있게 타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흔들리는 저 작은 나무들을 보면서 나의 신입 시절에 아찔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바람인데도 저 흔들리는 작은 나무처럼 나를 집어삼킬까 봐 미친 듯이 흔들리며 자신을 자책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겪고 난 지금은 저기 저 큰 나무처럼 그저 바람이 불면 그냥 그 바람들을 타고 그냥 흘려보내는 모습으로 어느새 바뀌어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에게 저 큰 나무들에 새겨진 수많은 자국들이 마치 내 상처인 것처럼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했던 상처들은 결국 잊히지 않고 상처로 남듯이 그 큰 나무의 일부가 되어 눈에 보이는 자국으로 남겨져 있었다. 아마 스쳐 지나가면 몰랐을 그 큰 나무의 상처 자국들을 나는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 자국들이 마치 내 상처인양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쩌면 남들에게 이 나무처럼 내 상처들을 보여주어야 내가 이렇게 바람을 타기까지 쉽지 않았다는 걸 이해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나는 그런 내 상처들을 남에게 하나라도 들킬까 봐 숨기기에 급급했던 했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주임 시절 막바지에 예기치 않게 김 과장에게 내 힘듦을 처음으로 이야기했고 그런 나를 이해한 그녀는 나에게 쉬어가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김 과장에게 나의 이 작은 상처 하나를 보여주기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저 상처 난 큰 나무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의 상처를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훈장인 것처럼 “나는 이런 상처 있다.”나는 지난 태풍 때 이렇게나 큰 상처가 났어” 말하면서 너 정도면 괜찮아라며 오히려 위로의 손길을 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사려니숲길을 2시간 넘게 걸었던 그 순간 나를 억지로 감추려고 했던 그 무언가로부터 벗어나 그저 이 나무들과는 같이 숨 쉬기 위한 숨을 내뿜으면서 다시 예전에 나로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처는 아물지만 그 자국은 남는 것처럼 이제야 나는 조금씩 내 안의 상처를 직원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상사가 왜 미친개로 불리는지 요새는 그녀의 히스테리가 왜 심한 건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시 돌아간다면 예약부의 큰 나무가 되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 다짐에 응답이라도 하듯 다시 돌아온 일터에 들어가기 위해 STAFF ONLY 문 옆에 놓인 검은색 보안 태그에 출근 카드를 대자 “출근입니다!”라는 너무나 밝은 목소리가 나를 반겨 주었다. 다시 돌아와 내 자리에 앉았는데 다들 여행 잘 다녀왔냐고 인사를 해주었다. 아마 그 말에는 ‘네가 휴가 가서 우리야말로 개 꿀 같은 휴가였어’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지만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화를 내지 않고 태연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메일함을 열었는데 그 메일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개의 빨간색 깃발이 꽂힌 메일들이 ‘여기요 제가 급해요!! 저부터 해주세요'라고 줄지어 외치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전화를 하지’라는 생각 들면서 다시 미친개가 되려는 듯 콧등이 간지러워졌지만 다시 그 제주도에 사려니숲길의 나무들을 생각하며 코를 강제로 찡끗하며 눌러 주었다. 나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염대리가 보낸 인수인계 메일을 읽기 시작했다
"허대리! 잘 쉬고 나왔지?"라는 메일에는 왜 그들이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는지 이유가 적혀 있었다.
김 과장이 예약실 미친개가 실성해서 다른 사람들 물기 일분 직전에 휴가를 보낸 거라고 절대 허대리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전화를 못해서 쌓인 일이 많다고 말이다. 그러다 내 모든 메일에는 염대리가 아닌 효연 주임의 답변으로 꽉 찬 보낸 편지함을 보게 되었다. 마치 그 메일은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갈 것 같아서 그만두지 못했던 나에게 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사는 돌아간다 다만 당신의 일은 그 부서에 가장 착하고 만만한 사람들에게 넘겨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 메일함을 읽다 보니 새 사람이 되겠다는 나의 다짐과 다르게 점점 예약실 미친개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친개 버릇 남 못준다고 아씨 점점 짜증 나네. 탁탁 탁탁”
그렇게 빨간 깃발이 꽂혀 있는 메일들을 미친 듯이 처리하고 있을 때 뒤에 앉아 있던 불쌍한 직원 1이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주임.. 님 아니 대리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헤헤헤”
직원 1은 나에게 프린트된 예약에 요금 확인 요망이라고 적혀 있는 종이를 불쑥 들이밀었다. 몇 분의 침묵 뒤 나는 직원을 쳐다보지 않고 자판만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야…. 나 효연 주임 아니야!! 나 허대리야 조금은 생각해 보고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불쌍한 직원 1은 그동안 따뜻한 봄처럼 착한 효연 주임과 일하면서 답을 받던 질문이 거절당하자 불현듯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더 이상 따뜻한 동산이 아닌 차디찬 시베리아 한복판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얘들아 봄은 끝났다. 다시 겨울 가야지!”
다들 “네”라며 이제 아침 조에 봄이 끝났음을 '미친 듯이 쳐대는 타자 소리'가 다시 한번 그들을 상기시켜 주었다. 때 마침 출근한 김 과장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인사했다.
“야 미친개 돌아왔네 ㅎㅎㅎ”
그렇게 다시 돌아온 미친개는 오전 내내 염대리에 대한 분노로 입에 거품을 품어대며 일을 마무리하고 인수인계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때마침 출근한 오후 조 효연 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보였고 그 눈에서 나는 지난 5일간의 착한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을 보았다.
“아.. 대리님 그 메일들 내가 다 할 거야... 그거 내가 다... 염 대리님이.. 흑흑”
나는 그런 효연 주임의 어깨를 말없이 툭툭 쳐줬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면서 조언을 해주었다.
“염 대리님이 보낸 러브레터들은 다 할 필욘 없어~ 짝사랑이잖아! 누가 사랑한데?! 제목이 비록 사랑하는 효연아 네가 다해! 였어도, 무시해야지 그걸 못 해서 그렇게 늦게 답변을 하고 퇴근을 했어?!"
라며 의자에 일어나면서 말했고 그녀는 어떻게 알았냐며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며 오후 인수인계 회의나 하자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보통 예약실은 3교대 업무기 때문에 아침 조에서 오후 조 바뀔 때 인수인계 회의를 해서 오전에 있었던 일 오후에 해야 할 일들을 서로 공유하곤 했다. 그래서 그 시간이 방금 휴가를 다녀온 내가 사려니 숲길의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내가 휴가 다녀온 사이에 새로 생긴 코너가 나를 그 회의실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그 코너의 이름은 “이 직원을 칭찬해 주세요”였다.
매주 한 명 직원을 뽑아서 우리 부서 직원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직원들이 칭찬하는 시간이었는데, 매일 손님들에게 컴플레인을 들으며 힘들어하는 직원들은 위한 고나라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뭐?? 칭찬?? 웩”
나는 설명을 듣는 즉시 물과 기름이 만난 것처럼 속이 거북해져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내 옆에 앉아 있던 김 과장이 내 손목을 꽈악 비틀어 잡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김 과장은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은 허대리가 이런 자리 처음이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기로 했죠? 다들 '허대리 칭찬합시다' 준비했어요?”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종이를 주섬주섬 하나씩 꺼냈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내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차라리 토끼가 나타나 나를 이 자리에서 뽑아서'데리고 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토끼는 나타나지 않았고... 한 명씩 일어나서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허 대리님은 매사에 냉철하시고, 제가 뭔가를 물어봐도 ”이거 생각하고 질문한 게 맞아? “라고 되물어 주셔서 허대리님한테 배운 것은 절대 잊지 않게 만들어주십니다.!”
"칭찬이긴 한데 칭찬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공인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칭찬 릴레이 행사는 계속되었다.
이어서 효연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대리님은 츤데레예요! 그래서 다정하게 손을 건네면 바로 울음이 나와요 아까도 울 뻔했잖아요~ 우리 부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예요!! 저를 더 빛나게 해 줘요~히히”
그리고 마지막 부서 내에 친구가 없다던 그 신입 민정이가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이 부서에 친구가 없었는데 대리님이 친구가 되어 주셨어요! 다른 부서에 대리님 친구라고 말하면 다들 저보고 많이 먹으라며 안쓰러워해요. 그녀처럼은 되지 말라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대리님처럼 되고 싶어요. 허대리님은 거의 5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해서 대리가 되신 거잖아요! 혹시 어떻게 그렇게 진급을 빨리 했는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어?.. 어? “
신입의 패기였을까? 아니면 진짜 본인과 나와 친구가 되었다고 착각을 하게 된 것이었을까? 그 신입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물음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김 과장은 냉큼 그 대답을 낚아채 대답했다.
“아 좋은 질문이네 허대리가 지금 막 휴가에서 와서 정신이 없을 테니까 내일까지 생각을 해서 발표하는 건 어때? 다들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아.. 씨 나 그런 거 못해!!!”
라고 소리쳤지만 김 과장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일 원래 염대리 칭찬한 시간인데 직원들이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하더라고 네가 대충 시간 좀 때워줘라!”
라고 말하며 김 과장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초고속 승진의 이유라...”
그렇게 나는 첫 휴가 후 피곤한 퇴근길 버스에 앉아서 어쩌면 나도 그 사려니숲에 큰 나무들처럼 이 바람들에 내가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바람을 타게 되었는지 나의 상처들을 보여줄 때가 되었구나 싶어졌다.
다음날 오후 2시 (예약실 사무실 안) 직원들은 이미 모두 착석해서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말하지 못하는 내 성격상 준비한 종이를 치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서 그들의 눈빛들을 뒤로 한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