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메일
해고 사유 : 임원으로서 매출 하락에 대한 총체적 책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메일에 적혀 있던 해고 사유였다. 밤새워서 일하며 보냈던 수많은 보고서들이 결국 나를 향한 날카로운 칼이 되었고, 결국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내 목을 댕강하고 잘라버렸다. 너무 열심히 일 해서 해고당하다니. 임원이라서 그런지 인사부의 가식적인 서류 절차도 해고를 위한 안내도 없었다.
그냥 너 지금 짐 싸서 나가라 식의 통보였다. 그때의 기분이라면 아마도 '내가 이 회사 때려치운다'라는 사직서 싸대기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더 시원한 냉수마찰을 맞은 기분이랄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한 대 맞은 기분으로 짐을 쌌던 건 분명하다. 당황스러운 당일 해고 통보에 내가 회사에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건 회사 로고가 박힌 친환경 갈색 쇼핑백과 그 안에서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는 최우수 직원 명패뿐이었다.
남들은 재택근무 같다고 부러워하던 1인 사무실에서 나오니 다른 사무실 직원들은 회의에 참석한 것처럼 주인 없는 의자 몇 개만이 휘휘 돌면서 나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해 주고 있었다. 10년 회사 생활에 인사 참 거하게 받네 라는 씁쓸한 기분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몇몇 직원들이 나를 향해 속삭이는 귓속말 같은 게 들려왔다.
"대박 인사발령 봤어? 오늘 잘렸나 봐. 최연소 이사면 뭐 하냐? 아무도 송별회도 안 해준다던데?"
"맨날 책상에 앉아만 있는데 마켓 돌아가는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 수익을 어떻게 관리하겠냐고? 고개만 고고한 학처럼 치켜들고 다니더니 쌤통이다."
"그만해 불쌍하잖아. 아마 앞으로 이 바닥에서 끝났다고 봐야지. 다 올라가는 데 시간이 있고 순서가 있는 건데. 쯧쯧"
왜 소리 없는 방귀를 뀌어도 미세한 소리도 들리는 이런 좁은 공간에서 꼭 흉을 보는 걸까? 그것도 그 사람 뒤에서? 나는 1층으로 빨리 도착하기 바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열심히 일한게 죄라면 죄일까? 내가 또 고개는 얼마나 들고 다녔다고... 억울한 마음에 한 마디 해야겠다고 뒤를 돌았지만,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밀치며 썰물 같이 빠져나갔다. 앞으로 내 이름으로 이 바닥에서 일하기 힘들 거라는 마지막 직원의 말이 내 귀에 남기고서.
그래서 익명으로 일 할 수 있다는 더 메모리 컴퍼니의 채용 공고를 마주했을 때 내 이름에 묻어있던 권고사직이라는 흙탕물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이라면 당장 박차고 나갈 이 면접자리를 말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개도 푹 숙이고. 한참을 내 이력서를 쳐다보던 김사장은 면접에 통과했다고 말했다.
“자! 수연 씨 그럼 내일부터 일하세요. 다만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네? 정말요? 조건은 뭔가요?”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을 우리 회사에 맡기는 겁니다.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 말이에요”
“기억을요?”
“아시겠지만,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기억을 팔아주는 일을 해요.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언제나 유혹에 빠질 수가 있죠. 유명한 연예인의 기억을 신문사에 판다거나, 갑자기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의 기억으로 알게 된 진실을 경찰서에 판다거나, 기억을 이용해 이윤을 취하려는 그런 리스크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무엇이 저에게 소중한 기억인지 알지 못하는데요?”
“그건 저희가 찾아서 가져갈 겁니다. 수연 씨는 그 사실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이 서류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깨알같이 글씨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과 검은색 펜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중 기억 남는 문구라면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임의로 팔거나 손상시키는 경우 당신은 소중한 기억은 영원히 돌려받지 못하게 됩니다’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최근까지의 기억 모두를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계약이었다. 오히려 돈을 주고 팔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내가 서류에 사인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김사장은 곧장 나를 기억의 방이라는 곳으로 안내했다. 새하얀 방이었다. 먼지 하나 붙으면 쉽게 눈에 띌 수 있는 그런 방에 헤드폰 하나에 하얀 벽에 띄어져 있는 검은색 화면이 눈에 띄었다.
그때 처음 ME.mory A.I. 를 처음 만났다. 사장님은 나에게 검은색 모니터를 보며 미모리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리곤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하얀 헤드폰을 건네며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미모리 김수연 씨의 소중한 기억을 보관해 줘"
김사장이 말을 끝나자 마치 비디오 빨리 감기를 버튼을 누른 것처럼, 처음 회사 입사에 포부가 넘치던 회사 시절, 대학교에 합격해 뛸 듯이 기뻐하던 모든 영상이 스캔하듯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릿속을 휘휘 젓더니, 무언가를 후욱하고 빼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당혹감에 눈을 깜박이고 있던 나에게 김사장이 다가와 말했다.
“모든 절차는 완료되었어요. 내일부터는 근무에 필요한 사항을 안내해 드릴게요 오늘은 이만 가셔도 좋습니다.."
“네….”
아직 얼떨떨해하는 나를 사장님은 안내하면서 설명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그렇지 곧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기억이라는 게 원래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지듯 변색되니까…“
그렇게 나는 사람들의 기억을 저장해서 파는 더 메모리 회사의 일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