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꿈꿨을 복수
"스테파니라고?"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소름이 끼친 내가 소리쳤다. 그 반응에 미모리는 신이 났는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수연 씨가 생각하는 그분. 얼마 전 스테파니 본사 부회장으로 승진하셨더라고요. 그분의 이름을 조직도에서 봤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래서?"
"그래서긴 뭘 그래서예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라는 복수를 위한 조건이 갖추어졌으니 이젠 수연 씨가 차란 씨를 위해서 명령어를 입력할 차례죠. 복수해 줘 미모리라고 “
“복수라.. “
미모리는 내 결심을 부추기기 위한 것처럼 기억 속에 박팀장과 세련이가 웃어대던 웃음소리를 찾아서 스피커로 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가슴속에 묻혀있었던 잔잔한 불 같았던 기억을 거칠게 타오르는 분노로 단번에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 거지 같은 것들이 내가 나올 때도 웃고 있었어. 그 순간을 놓칠세라 미모리 달콤하게 속삭였다.
“얼른 말해줘요 복수해 줘 미모리!라고“
순간 미모리의 목소리가 초콜릿을 잔뜩 바른 손을 나에게 내미는 것 같이 느껴졌다. 초콜릿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은 달콤했고, 손에 끈쩍 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초콜릿이 앞으로 내가 할 일에 대한 죄책감을 덮어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꿨을 복수. 나를 괴롭힌 상사가 길 가다가 넘어져서 몇 달 휴가 가는 상상 혹은, 나를 괴롭혔던 선배가 비참하게 회사에서 쫓겨나는 모습.
물론, 미모리가 제안하는 것이니 만큼 성공할 확률 또한 매우 높을 것이다. 심지어 미모리 뒤에서 숨어서 하는 복수라니. 나는 아직 죄를 짓진 않았지만 앞으로 죄를 지을 사람처럼 미모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성공 확률은?"
"99.9%로 예상되네요. 0.1%는 수연 씨가 제 제안을 거절할 확률이니 거의 100%라고 할 수 있죠?"
백프로라니, 이건 못 먹어도 고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미모리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복수해 줘 미모리! “
비장한 내 결심을 들은 미모리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수연 씨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결말까지 모두 저에게 다시 기억을 팔아주세요."
"그래 그건 어렵지 않지. 성공만 한다면 말이야."
"그럼 저희 복수를 시작하죠."
미모리는 신이 난 듯 무언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미모리가 한 글자씩 모니터에 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도파민을 가득 담은 심장이 탄 열차가 어둠을 통과해 빛을 향해 가듯이 빠르게 질주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미모리는 타이핑을 마치고 다 되었다며 나에게 메일 내용을 확인 차 읽어주었다.
Dear. 스테파니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스테파니 본부장님 먼저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이미 보고 받으셨다시피 저는 사내 CCTV를 분석하고 결과를 안내해 드리는 A.I. 미모리라고 합니다. 얼마 전 본사에서 아시아 총괄 디렉터 후보로 등록된 민 사장님 관련 사내 평판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습니다. 확인 결과 2020년 9월 20일 오전 8시 30부터 10시까지 민 사장님 비서실과 지하 1층에 위치한 연회장에서 명백한 업무상 위반 사항이 발견되어 첨부합니다.
*확인 된 사항: 업무 상 책임 회피 및 직무태만 등
참고로 꼭 메일은 답장을 보내기 전에 항상 확인하고 보내시길 바랍니다.
CCTV 담당자 미모리 올림
"어때요?"
아..차란이의 기억을 CCTV 화면인 것처럼 보내는 거야? 명목상은 민 사장이지만 그 안에 박팀장과 세련씨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겠는데? 그런데 저건... 익숙한 냄새가 묻어나는 저 문장은? 나는 밑줄 처져있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메일은 답장을 보내기 전에 항상 확인하라고?'
저건 내가 8년 전에 스테파이사님께 잘못 보냈던 이메일에 적혀있던 문장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내 흑역사를 끄집어내는 미모리가 원망스러워 미모리에게 따졌다.
"아니 미모리 어차피 스테파니 본부장님은 기억도 못 할 텐데 저렇게 똑같이 적어야 해?"
라고 따지니 미모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수연 씨. 저게 우리 메일의 핵심 포인트예요. 스테파니 본부장님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첨부 파일을 결국 열어보게 만드는.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세요? 기억은 작게라도 흉터를 남겨요. 다만 흉터를 낸 사람들에겐 그저 스치는 스크래치 정도랄까? 금방 살이 차오르고 잊히죠. 하지만 당한 사람들은 절대 그 흉터를 잊지 못해요. 오히려 잊지 않으려고 매일 거울을 들여다봐요. 그때의 치욕을.“
"...."
“생각해 보세요 한낮 사원 나부랭이가 본사 이사에게 일을 똑바로 하라고 메일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떻겠어요?"
더럽겠지. 아주. 그런 짓을 저질러버린 과거의 내가 떠올라 차마 어떠한 반박할 수 없었다. 미모리가 메일을 보낸다고 되묻는 질문에도 그저 고개만을 끄떡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치 미모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스테파니 본부장님께 보낸 메일은 빛의 속도로 읽지 않음에서 읽음 바뀌었다. 기억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내 과거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스테파니 본부장님의 답변이 도착했다.
"그러겠습니다ㅎㅎ. 당신의 메일이 지난 제 아린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네요."
과거의 나를 소름 돋게 만들었던ㅎ이 ㅎㅎ가 되어서 돌아오다니. 다른 건 몰라도 민 사장의 일에 스테파니 본부장의 개인적인 감정까지 투영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끈 거리던 머리에 초콜릿 가루를 뿌린 것처럼 통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