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검은색인 이유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방 안
밤 11시 30
10평도 안 되는 첫째 소유의 오피스텔 원룸에 불편하게 남색 줄무늬 이불을 며칠이나 감지 않을 걸로 추정되는 더벅머리 위로 덮고 혹시나 자신이 보는 핸드폰 불이 새어나갈까 봐 새우등 자세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늘”이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깜짝 놀라 전화를 받으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확인했는데, 다시 한번 찍힌 번호에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자신도 모르게 이불 밖으로 던져버렸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는
'999'
일전에 제목 없음으로 전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한 사실을 취중고백을 했던 몇 백통의 문자에 찍힌 번호였다.
'뭐야?! 아직 문자로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보이스 피싱?'
갑자기 밀려오는 온갖 잡생각에 선뜻 이불 밖으로 던진 핸드폰을 주우러 가지 못하고 있었을 때 핸드폰 벨소리는 '어디 네가 받을 때까지 울 거야'라는 듯이 미친 듯이 울어댔다.
그리고 그때 그 핸드폰 벨소리보다 더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야! 늘! 당장 그 전화 좀 받아라 안 그러면...."
아직 자신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첫째는 자신의 경고가 말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암시하듯이 침대 아래에 자고 있던 "늘"에게 '휘인 휘잉' 자신의 발을 휘저어 보였다.
"아... 어!!!"
첫째의 발소리에 정신을 차린 “늘”은 평상시보다 몇 배의 속도로 이불 밖으로 기어나가 전화를 받고 말았다. 어쩌면 “늘”에게는 보이스 피싱을 대한 두려움보다 어릴 때부터 맞아온 첫째의 발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엉겁결에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여.. 여.. 보세요?”
“김하.. 늘씨?”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하늘이 아닌 "늘"이었기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했다.
“저는.. 김하늘이 아니라 김늘인데요... 전화를 잘못 거신 게 아니실지..."
"아.. 저희 그림자 세상에서는 '김하늘' 씬데 어쨌든 지금은 "늘"씨라고 부르는 게 맞겠군요. 그럼.. 늘씨 저는 그림자 세상에서 입주 절차 안내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저는 입주자 대표 김 대표입니다.”
“네?”
“얼마 전에 제가 문자를 보내드렸었는데 혹시 받지 못하셨나요?”
“네.. 받기는 받았는데 저는 그게 장난 문자인 줄.”
“(갑자기 정색하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저희 그림자들은 절대 장난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는!! 그림자들입니다. 혹시 "늘"씨에게 장난으로 문자를 보낸 그림자가 있었나요? 있었다면 제가 그 그림자의 다리몽둥이를 뿌셔..”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제가 그림자 세상이라는 곳을 지원한 적도 없어서요.”
“아하하하.. 큼큼 (흥분했던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그렇죠 지원하시지 않으셨지만 많은 그림자들의 추천을 받으셔서 뽑히시게 되셨습니다.
“네? 추천이요?”
“자세한 설명은 저희 그림자 세상에 오시면 드리는 걸로 하고 오늘 제가 전화를 드린 목적은 현실 세계에서" 늘"씨가 그림자 세상에 입주할 때를 맞춰서 저희가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여쭙고자 전화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아 조금 혼란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저희 그림자 세상에 입주하시게 되시면 원하시는 주거형태를 정해서 입주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식물들이 알아서 자라는 정원이 있는 하우스라든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최첨단 방어력과 방음벽이 가득 찬 게임방이랄지, 초고층 빌딩에 화려한 전망을 삼시 세끼가 제공되는 집이라든지 원하시는 모든 지 준비해 드릴 수 있어요. 물론.. 그 비용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셔야... 아. 아.. 아닙니다. 혹시 늘 씨는 어떤 집에 살고 싶으세요?”
혼란스러웠던 “늘”은 갑자기 자신의 집이라는 입주자 대표자의 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떤 집이라니!
“늘”은 평생 내 방을 갖고 싶다는 막연한 꿈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30년 평생 아직 자신의 방 하나 같지 못한 채 첫째 주연에게 얹혀사는 게 현재 "늘"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방이 아닌 집에 살고 싶냐? 라니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은 말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자신 마음속 깊은 바다에 꽁꽁 묶어 두었던 여러 단어들이 줄을 서지 않고 사방에서 뛰어나오는 불꽃놀이처럼 튀어나왔다.
"한강이 보이는, 다락방, 책이 많은 서재, 잔디, 마당, 강아지, 작업실, 조용한, 온천, 수영장"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그 단어들이 갑자기 예전 “늘”이 들었던 아련한 기억이 하나 떠오르므로 인해서 다시 마음의 바닷속으로 다시 가라앉게 만들었다.
3년 전
무더운 여름밤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그림자들 옆을 “늘”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주인의 그림자가 말이 “늘”의 귀에 들려왔다.
"야 오랜만이다. 요즘은 왜 이렇게 카페에 안 왔어 나 혼자 심심했잖아!"
반대편 의자를 끌며 앉는 안경 쓴 주인의 그림자가 대답했다.
"야 이 인간 무슨 글쓰기 공모전 준비한다고 집에서 꼼짝을 안 하잖아 그래서 나도 갇혀있었지 뭐 그래서 겨우 일주일 만에 밖에 나왔다. 아차차 그런데 이 인간 공모전 주제가 뭔 줄 아냐?"
"뭔데?"
"하우스 푸어래! 깔깔깔깔 하우스 푸어는 인간들이 자기 집을 사려고 평생 가난하게 사는 거라는데 완전 단어 잘 만들었어 그거 우리 이야기 아니냐?"
"깔깔깔 맞네 니 주인한테 그림자들 인터뷰 따라 해! 책 한 권이 뭐야 24권짜리 장편 소설도 쓸 수 있을걸?"
"그러니까.. 그 입주자 대표라는 작자한테 내 드림하우스를 말하는 순간 빚을 갚기 위한 동굴로 들어가게 되는 거야~눈이 멀어서 말이야 “
"맞아 안 봤으면 몰라도 내 드림 하우스를 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순간 눈이 도는 거지!"
"깔깔깔깔 그래서 우리 얼굴이 다크 써클로 다 덮여버렸잖아. 그놈의 드림하우스에 살려고 아등바등 일하다 보니까 인간들은 알까? 그림자가 까만 이유를 말이야!"
둘이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몸 전체가 다크 서클이에요 깔깔깔깔"
갑자기 떠오른 그 기억으로 인해 불꽃놀이처럼 튀어 오르던 단어들이 다 사라지고 겨우 남은 욕망이 채운 한 글자는 "책이 끝없이 채워지는 책장"이었다.
"늘"은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눈 감고 그 책장이 놓여 있는 방 하나를 상상해 보았다.
하얀색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양쪽에 책들이 끝도 없이 빽빽이 채워져 있는 책장에 책들이 높이를 알 수 없게 잔뜩 꽂혀 있었고, 그곳에는 매주 월요일 10시가 되면 책의 평점과 책 추천 이유가 적혀 있는 새 책들이 번쩍 하면 책장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작은 체리색 멀바우 나무 책상 위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과 깃털이 꽂힌 필기구들이 있었고 그 옆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와 물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늘"이 그곳을 상상하며 숨을 쉬자, 그곳에서 나는 듯한 은은한 종이 냄새와 찐득한 물감 냄새가 “늘”의 코끝을 찔렀고, 그 냄새 때문이었을까? “늘”은 갑자기 툭하며 혼잣말을 뱉고 말았다.
“아마도... 그렇게 책이 끝없이 펼쳐지는 서재가 있는 집이라면 당장 가서 살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김 대표는 "늘"이 상상한 그 방을 자신도 본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 외에는 필요한 건 없으세요?”
김 대표의 말에 잠시 상상에 빠졌던 “늘”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아.. 아.. 아까 한말은 취소 취소예요”
그러나 입주 대표자는 “늘”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늘”의 대답을 뭉개버리며 다음의 설명을 이어갔다.
“입주 절차는..
끼어들 틈 없이 이어지는 설명을 듣던 “늘”은 갑자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네? 뭐라고요?”
“아 문자로도 보내드릴 테지만 9월 9일 오후 9시에 금빛 호수공원으로 가셔서 9-B 표지판을 찾으세요. 그리고 표지판 옆 물속으로 뛰어드시면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입주 절차가 끝납니다.”
“네? 아니 물속을 뛰어들라고요? 저는 수영을.. 못 하는데..”
“상관없습니다. 9시가 되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물에 뛰어들게 될 테니까요"
-뚜뚜뚜뚜-
그렇게 갑자기 끊긴 핸드폰을 “늘”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귀신에게 홀린 것 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핸드폰엔 통화 종료 5분 30초라는 시간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문자 소리가 들렸다
“띠링”
*입주자 상담이 만족스러웠다면 0번을 아니면 1번을 문자로 보내주세요.
연이어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당신의 입주일은 9월 9일 오후 9시
호수공원 9-B 표지판 앞입니다.
"늘"은 그 문자를 받자마자 밖으로 무작정 뛰어 나갔다. 5분 30초간의 전화가 꿈인지 아닌지는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되라는 마음으로 집 앞 금빛 호수공원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제발.. 제발 9-B라는 표지판이 없기를"
하지만 멀리서 봐도 희미하게 9-B라는 표지판 번호가 "늘"의 눈에 선명하게 찍혀 보였다.
그럼 방금 전 전화는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심지어 장난전화도 아니었다.
9-B라고 적힌 표지판에 비상전화번호라고 적힌 번호가 "늘"에게 걸려온 전화번호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