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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Aug 19. 2024

재계약에 실패했습니다.

소문의 시작

 늦은 저녁, 나는 카페 창가에 앉아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처리하고 있다. 머리를 감을 시간조차 나에겐 사치였기 때문에 대충 회색 후드티만 걸치고 나왔는데, 노트북은 자기의 할 일을 다했다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여기까지만 할게라며 외쳐봤지만, 무심한 노트북은 그만 꺼져버리고 말았다.


'젠장, 하늘도 무심하시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눌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꺼진 모니터에 비친 빨갛게 선 내 눈과 세 번의 리필로 얼룩덜룩해진 커피잔만 보였다. 오늘까지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 그러면 주말 내에 쌓인 일들이 홍수처럼 나를 덮칠게 분명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렇게 신청자가 많을 줄이야. 깊은 한숨이 단전에서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그때 한순간에 내 분노를 차갑게 식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나 이번에 재계약에 실패했어!"

 

  재계약?이라는 단어가 날카로운 신경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검은 모니터에 비친 세 명의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딱 봐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원탁의 기사처럼 비장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누가 그 말을 한 건지 조심스레 찾아봤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재계약에 실패했다고 하기엔 모두 밝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특히 로즈색 플리츠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옆에 앉은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로즈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머 축하해! 나도 얼마 전에 만기 돼서, 계약 어플에 가입했잖아. 완전 신세계야. 자 여기 QR코드 찍어봐."


  계약이 불발된 건 로즈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구나. 그런데 저렇게 웃고 있다고? 심지어 그녀의 양옆에 앉은 두 명의 친구는 위로를커녕 축하한다며 박수까지 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서로의 핸드폰을 꺼내 모서리끼리 부딪치고 다시 가져가 화면을 보고 웃고 있었다. 이번엔 로즈색 플리츠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윤기 나는 긴 생머리를 흔들며 셀피를 찰칵하고 찍더니 말했다. 


"미자야! 나도 지금 등록했어. 이거 완전 신세계네, 미자 너는 건강도 10점 외모도 10점 심지어 살림도 모두 다 10점 만점이야"

아마도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미자인 것 같다. 미자가 대답했다.

"야 말도 마! 그 인간이 유책 배우자여서 나를 평가를 할 수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내가 나를 평가했잖아. 사실 내가 그런 인간이랑 20년을 살았는데, 이 김 미자가 만점이지! 누가 만점이겠어?"

"야! 당연하지. 나는 내 남편한테 전 재산 다 주면 재계약해주겠다고 했더니, 됐다더라 한번 나 없는 삶을 지내봐야 정신 차리지. 다 늙은 여자가 언놈이랑 계약 결혼 다시 할 수 있겠냐고 나니까 살아주는 거라며 악담을 하는데, 어찌나 억울하던지, 없는 볼살까지 떨리더라니까"

"수미야! 걱정하지 마! 이 언니 믿지? 내가 한 달 내로 너를 이 재계약 시장에서 VIP로 만들어줄게!"

그 옆에 앉아 있던 하늘색 스카프를 두른 여자가 미자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야! 미자야 나는?"

"오 세라야 걱정 마! 너 만약 재계약 불발되면, 내가 취직도 시켜줄게! 살림 경력직 15년 차로 다가"

"오예~" 

 세 명의 여자가 원탁 위에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새 출발의 의지를 다진다. 아무래도 김 미자라는 분이 그들을 이끄는 선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탄 배는 쾌속선이 될 것이다. 관리자인 내가 '김 미자'라는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핸드폰을 꺼내 얼마 전 확인 했던 김 미자라는 데이터 값을 다시 불러왔다. 그녀와 관련된 결괏값이 축출되었다.


*VIP: 재계약 우선 후보

1971년생 3월 14일 김 미자 

ID: 꽃보다 미자

20년 차 결혼 재계약 불발

이유 : 유책 배우자 (구봉식 씨)에 대한 신뢰 회복 불가


건강,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점수가 거의 A+를 향했다. 그녀의 점수를 보니 김 미자 씨의 데이터를 처음 뽑았을 때도 놀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미자 씨를 기억하는 이유는 점수 때문은 아니었다. 결혼 계약 만료 신청을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들. 신청 이유는 한 줄로 간단했지만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더 이상 저 때문에 불행한 삶을 참고 사시는 걸 볼 수가 없어서 신청했습니다." 

 

 보통 본인이 아닌 제삼자가 계약 결혼 만기를 신청하면, A.I. 가 아닌 내가 구체적인 데이터를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엔터키를 누르자 나는 김 미자 님과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국계 식품 기업에서 나름 인정을 받으며 경력을 쌓고 있었는데,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구 봉식 씨와의 한 번의 만남으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됨'

 

 20년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나는 연관검색어에 뜬 구 봉식이라는 남자를 클릭했다. 유책 배우자이기 때문에 회색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F-형 최악의 배우자라는 표시와 함께, 불륜과 알코올 중독이라는 간단한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안 봐도 비디오군. 구 봉식 씨 당신은 앞으로 취직도 힘들어질 거야! 이 데이터가 항상 당신을 따라다닐 테니까"


 그게 계약 결혼 어플의 취지였다.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배우자에게는 혜택을 그 신뢰를 저버린 배우자에게는 질책을 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놀랍게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인터넷에 그냥 끄적인 게시글로 인해 시작되었는 점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엔 아무도 이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대충 해결하라며 나 같은 인턴 나부랭이에게 던져졌을 것이다. 하지만 대충 떠맡게 된 그 일이 갑자기 분 바람을 타고 파도를 휩쓸리다 보니 어느새 예상치 못하게 지점까지 끌려와서 이렇게 어깨춤까지 추게 되어버렸다. 


 관련 법안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갑자기 저출산에 대한 이유가 결혼 회피와 급증하는 이혼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형성되더니, 빠른 속도로 계약 결혼 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A.I. 기술을 기반한 계약 결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되었고, 관리자로 그 글을 처음 담당하게 된 나에게 배정되었다. 이게 모두 다 근 일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은 더 이상 이혼 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재계약에 성공했다던가 실패했다며 웃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과거의 잣대로 선입견을 갖고 보지 않게 되었고, 굳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QR코드를 보여주게 되었다. 어떻게 글 하나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 것일까? 


 어쩌면 시계가 죽은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충전하면 다시 켜지는 노트북처럼 잠시 멈춰져 있었을 뿐. 그때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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