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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Aug 26. 2024

흙속에 묻혀 있던 씨앗 하나

악몽보다 더 잔인한 현실 

'어둠에 둘러싸여 있을 때 빛을 쫓게 된다.

빛에 닿기만 하면 내 인생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그 믿음 하나 때문에.

하지만 정작 빛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는 사라지고 없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빛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결국 차오로는 절망감이 나의 발을 붙잡고 주저앉게 만들고

빛은 바로 눈앞에 있지만,

결국 어둠 속에 갇힌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다.' 


1년 전, 나는 나와 연결된 모든 실들을 끊고 무작정 도망쳤다.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엔 떠오르는 한 가지 이미지가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나를 따라다니던 장면이었다.


 그날도 어느 때와 다르게 야근을 하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그때의 내 삶은 뭐랄까? 매일 바늘로 나를 찌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떤 비명조차 낼 수 없었다. 소리를 내봤자 그건 어린아이의 응석이나 사회 부적응자가 내는 소리에 불가했으니까.


그건 회사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땅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느낌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절망적인 건 갇혀있다는 사실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날도 역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달랐던 건 잠시 내 차가 빨간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하게 되었고, 그 옆에 검은색 외제차가 서 있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신도시 신호가 유난히 길었던 탓인가? 내 눈은 검은색 외제차를 향했다. 창가에 놓인 하얀 물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썬텐을 한 건지 하다 만 건지 얼룩 덜룩한 무늬가 창문에 잔뜩 그어진 창문 위로 하얀 팔이 축 늘어져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뭐랄까 힘 없이 널려 있는 빨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 다시 봐도 핏기가 사라진 사람의 팔이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뭐야? 저건.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그 차에 관심이 없다는 듯 조용했다.


 어떻게 이렇게 남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지? 싶었지만 뒤차가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출발하면서도 동승자가 저러고 있는데 운전하는 사람은 뭐 하는 거야? 라며 운전석을 쳐다봤는데, 어렴풋이 스쳐본 운전석에는 분명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그 순간부터 집까지 어떻게 돌아온 건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람의 기억이었다. 파란색으로 바뀐 신호등. 주차장에서 나를 무심한 표정으로 스쳐가는 사람들. 그리고 핏기 없는 하얀 팔만의 잔상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매일 같은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악몽의 시작은 병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핏기 없이 하얀 팔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내 팔에 굳은살이 가득 배긴 손가락이 닿았다. 차가웠다. 흠칫 놀라 흘겨본 팔에는 흙색처럼 바래져 버린 손톱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진 바짝 갈라진 입술이 마른 낙엽처럼 스치는 소리를 내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딸. 엄마처럼 살면 안 돼.”


툭. 힘 없이 떨어지던 팔과 함께 들리는 심장이 멈추는 파열음. 나는 순간 놀라 엄마라고 외치며 침대에 누워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엄마 얼굴이 아니었다. 너무 익숙한 얼굴. 으깨진 두부처럼 일그러져 있는 내 얼굴이었다. 나는 소리 지르며 악몽에서 깼다. 매일 같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악몽을 꾼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악몽도 익숙해졌다. 오늘도 악몽을 꾸었다며 나는 눈을 파르르 떨며 떴다. 침대에 묶인 사람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검은 차에 축 늘어진 팔이 떠올랐다. 왼쪽으로 돌아 누워서 자서 눌린 탓인지 팔에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찰나의 순간 결국 이렇게 내가 죽는 거구나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마 위로 싸늘하게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간신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왼팔을 바라보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왼팔이 핏기 없이 하얗게 보였다. 역시나. 악몽이 현실이 된 것만 같았다. 힘겹게 갈라져 있던 입술을 떼어 말했다.


“여… 보.. 살려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뜨거웠다. 하지만 잠귀가 어두운 남편은 태평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다시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내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현실이 더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내가 죽어가도 구해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부터 무작정 도망쳤다. 어둠이 나를 더 이상 집어삼킬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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