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영은 "괜찮아."라고 말하며 요한을 다독여주었다. 요한은 쉽게 마음을 다 잡지 못했고, 아영은 그저 요한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요한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미안함의 주체가 아영이었는지, 그녀였는지 요한은 알지 못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요한이 겨우 울음을 그치고는 엉망이 된 얼굴로 아영에게서 떨어졌다. 아영의 옷은 요한의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녀 역시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요한이 눈물을 닦고는 말했다.
"미안해, 갑자기. 해야 할 것 같았어. 언젠가는. 그런데 그게 하필 오늘이었네. 정말 미안해."
"미안한 건 아나 봐. 이 바보야, 그렇게 힘들었으면 진작 이야기를 하지."
아영은 훌쩍거리며 간신히 대답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빈 담뱃갑을 꺼내고는 구겨서 땅바닥에 던졌다.
"담배도 없잖아."
"지금이라도 사 올까?"
"됐어. 들어와. 커피 한 잔 하고 가자."
아영이 간신히 웃으며 다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카페엔 커피냄새와 락스 냄새가 살짝 섞인 묘한 냄새가 났다. 아영은 창가 테이블로 다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의자를 다시 원상태로 내려놓았다.
"앉아있어. 마실 거 가지고 올게. 뭘로 마실래?"
"그냥 물이면 될 것 같아."
아영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 다음, 냉장고에서 생수 두 병을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요한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생수를 내려놓았을 때,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구만. 일단은."
아영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했다.
"걔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너 생각은 뭐야?"
"잃고 싶지 않아."
"뭘?"
"우리 셋의 사이를."
요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아영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음, 옛날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 셋이 만났을 때 이야기부터, 유민의 옆집 할아버지의 감나무에 감을 따다가 장독을 깨 먹은 일, 가출한 아영을 유민과 요한이 찾아왔던 일, 중학생 때 점심이 맛이 없다고 담을 넘어 떡볶이를 사 먹고 왔던 일...
요한도 질세라 자신이 기억하는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학창 시절은, 항상 유민과 아영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셋의 관계는 쉽게 깨지지 않을 것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둘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요한은 문득 유민의 말이 떠올랐다.
[난 네 편이야. 아영이도 그럴 거고.]
"어쨌든, 고백을 할 거면 좀 더 멋있게 해 봐. 그런 얼굴로는 될 것도 안 돼."
아영이 그렇게 빙긋 웃으며 말했고, 요한은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걔가 오해를 한 거지."
"오해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어쨌든, 나 때문에 헤어진건 맞잖아?"
"아니라니까. 이제 집에 가자. 시간이 너무 늦었어."
"그래. 그럼, 오늘은 집까지 데려다줄 거야?"
"아니, 항상 그랬던 것처럼 우리 집까지만."
"그래라.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영이 먼저 일어나 요한의 어깨를 툭 쳤다. 요한도 뒷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의자들을 테이블 위에 올린 다음 카페에서 나와 집을 향해 걸었다. 둘은 집으로 가는 길에도 옛날이야기를 했다. 항상 하는 이야기라 진부하지만, 그 이야기들보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은 없을 거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둘은 요한의 집에 도착했다. 요한의 집 앞 가로등은 노란빛을 바닥에 은은하게 깔고 있었다.
"잘 가. 다음에 또 봐."
인사를 먼저 한 건 요한이었다. 아영은 가로등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자. 아, 그리고 오늘 알게 된 게 하나 있어."
"뭔데?"
"다음에 너나 유민이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너희들을 잘 아는 척하지 말고 조신하게 있을 것."
그렇게 말하고는 아영은 죽겠다며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요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눈물이 날 만큼 실컷 웃고는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아영이 조금 걸어가다가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일 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인사하고, 만나는 거야."
"물론이지. 내일 봐."
요한은 자취방으로 들어갔고, 곧장 창문으로 향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멀어져 가는 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아래에는 선인장이 있었다. 그 사이 선인장은 꽃을 활짝 피웠다. 그런 괴상한 모습에서 그렇게 예쁜 꽃이 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요한은 선인장과 함께 멀어져 가는 아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노란빛의 가로등이, 이번엔 그때처럼 깜빡이지 않은 채 아영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밤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나서, 가로등이 더 이상 그녀를 비추지 않고 나서도 요한은 창가에서 오랫동안 밤거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