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 8

by 에드윈

8.


한요한 감독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잘려나간 필름 조각들. 조각들은 쓰레기통에 가득 담겨있었다. 요한은 그 필름들을 다시 찾을 수 없기 전에, 그 조각들이 잊히고 또 변색되기 전에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다른 장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편집했던 장면은, 그들의 이별 장면이자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였다.


-


이상하게 유난히 추운 그 해 가을이었다. 낙엽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무의 이파리가 얼어 죽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추웠던, 가을이었다.


그날은 춥지 않았기에, 강의도 취소되었고, 그리고 네가 아주 예쁘게 나왔기에 그러므로 웬일로 완벽한 날이었다. 영화를 보고 네가 서럽게 운 것을 제외하고는. 마을버스에서 내려 너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노란빛을 내려쬐는 가로등이, 넓지 않은 골목길을 물들이는 곳이었다.


마치, 가을날 은행잎이 깔려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날따라 골목길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전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녔던 길이었는데.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다했어?”


내가 너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너는 응, 이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보며, 너는 바보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슬프게 느껴진 건 너의 부은 눈 탓이었을까, 너의 눈을 통해 바라본 너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늘 날씨 참 좋다 그렇지? 오늘은 예쁘게 하고 나오고 싶었어. 패딩 같은 거 말고.”


너는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미처 몰랐다. 네가 연갈색의 코트와 흰색 셔츠와 검은 스커트, 검은 스타킹과 같은 색의 구두, 그리고 약간 촌스러워 보일 것 같은 꽃무늬가 들어간 푸른색 목도리가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20대의 나이엔 살짝 어색해 보일 수도 있는 너의 그 옷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엄청 예뻐. 오늘. 그런데 생각보다 밤이 되니까 많이 추워지네. 너 감기 걸릴까 봐 걱정돼서 그래.”


너는 고마워,라고 말하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러고 나서 너는 조금 빨리 걸어 나의 앞에 섰다. 너의 옆에 맞춰서 걸으려 했지만 너는 이상하게 나보다 한 걸음, 반 걸음을 앞서 걸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천천히 걷자.”

“아무리 오늘 날씨가 좋아도 가을은 가을이잖아. 나 조금 추워.”

“그럼 따듯하게 입고 오지 그랬어?”

“예쁘게 하고 나오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너는 걸음을 멈춰 섰다. 낡은 전봇대 아래였다. 전봇대엔 낡은 전등이 힘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너는 나와 내 키만큼 떨어져 서 있었다. 너의 그림자가 나의 발아래에 닿았다. 전등이 깜빡거릴 때마다 너의 그림자는 나의 발치에서 사라졌다가 또다시 생겨났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잠깐의 침묵을 깬 것은 너였다. 너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잘 못 들었겠거니, 하며 난 너에게 다가갔다. 너의 고개가 무너졌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너의 어깨를 잡고 너를 돌려세웠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너의 얼굴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왜 헤어지자고 말한 사람이, 이리도 아파한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하려 노력했다.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하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 노력했지만 바보같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 헤어지자구.”


너는 떨어지려 하는 눈물을 억지로 붙잡으며 그렇게 또박또박 말했다. 나의 눈이 흔들렸다. 너의 눈에 비친 나의 눈은 어땠을까. 슬픔이었을까, 당혹감이었을까, 증오였을까. 만약 그런 감정들이 아니라면, 그것은 죄책감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


“왜?”


너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육감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길 바라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겁이 나, 그만 머리가 핑 돌았다.


“오빠. 아니 한요한. 솔직하게 하나만 대답해 줄 수 있어?”

“뭐든지.”


너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이,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너의 눈 속엔 그전과 다른 감정이 있었다.


“아영 언니야, 나야?”

“무슨 그런 질문을 해? 당연히 너지.”


그 말을 듣고서 너는 눈물을 다시 한번 쏟아냈다. 달래주려는 나의 손을 뿌리쳤고 안아주려는 나의 품을 한사코 밀어냈다. 나는 너와 다시 한 발짝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붙어있지 않다면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1cm든 1km든 간에. ‘한 발짝’의 거리감을 그전까지 알지 못했다. 물리적 한 발짝의 거리는, 정신적으로는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머나먼 다른 항성계와 같이 느껴졌다. 나는 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한참을 울던 너는 울음을 그쳤다.


“알아. 아는데, 정말 아는데. 오빨 믿는데. 오빠가 진심이란 거 너무 잘 알아. 그런데 내 마음이 너무 이상해. 언니만 보면 질투가 생겨. 오빠를 뺏을 것 같고, 나보다 오빨 더 잘 알고. 그런 건 괜찮아. 언닐 안 만나면 되니까. 그런데 오빠를 볼 때마다 왜 언니와 겹쳐 보이는지 모르겠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리석게도, 또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아영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를 향한 내 진지한 마음과 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아영을 향한 내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는 것을.


“네가 그렇게 힘들면 내가 걔를 안 만나면 되지. 걔보단 네가 나에겐 훨씬 더 소중해. 왜 그런 걸로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해. 솔직하게 말해줘서 그래도 고맙네. 이제 마음이 좀 풀렸어?”

“마음이 좀 풀렸어. 그리고, 정리도 된 거 같아. 오빠, 예전에 도서관에서 했던 말 기억나? 오빤 감정적인 연애를 하기 싫다고. 감성적인 연애는 좋지만 감정에 휘둘리는 행동은 서로 하지 말자. 예쁘게 연애하고, 혹시나 헤어지더라도 남들과 다른 아름다운 이별을 하자고. 책갈피를 꽂아 두고 오랫동안 볼 만한.”


너의 표정은 한 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여전히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했지만, 중력을 애써 거스르고 너의 눈 안에서 차오를 듯 말듯하며 너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너는 코를 한 번 훌쩍하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다시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나에게 살짝 멀어졌다. 한 발, 두 발, 셋, 넷. 다섯 발자국을 앞서 걷고는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나 그 말을 하는 오빠가 좀 멋있었다? 친구들은 쿨찐이라고 욕했어도, 그래도 난 왜 오빠가 그런 말을 나한테 했는지 알았거든. 미안해. 나, 오빠한테 그런 이별을 남겨주고 싶었는데 내가 감정 조절을 못했어. 끝까지 못난이로 남아버릴 거 같아.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도 마지막은 힘내서 해볼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너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오빠, 이제 그 말처럼 우리 예쁘게 마무리하자. 난 오빠 기억 속에 예쁘게 남고 싶고, 나도 오빠를 내 기억 속에 멋있게 남기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모습 계속 남겨놓을 수 있게, 멋있게 보내주지 않을래?”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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