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 5

by 에드윈

5.


요한과 유민, 아영은 동갑인 친구였다. 셋은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요한이 초등학생 시절, 아영과 유민의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길로 셋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이 살던 동네는 이사 갈 곳이 없거나 비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한 노년층이나 빈곤층들이 주로 사는 몰락해 가는 달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자기 또래의, 그것도 동갑인 아이가 왔으니 셋이 곧바로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중학생 때 유민의 집안 사정이 다시 좋아져서 그는 근처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갔지만 전학은 가지 않았다. 그들과 학교에서만이라도 헤어지기 싫다는 완강한 주장이었고, 부모님도 그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덕분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셋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셋은 ‘삼총사’라고 불렸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붙어 다녔고, 다소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유민 덕분에 셋은 소소한 사고를 학교에서 저지르곤 했다. 하지만 셋 다 성적이 좋았고 수업태도나 교우 관계에도 좋았기에 선생님들에겐 사랑을, 다른 학생들에겐 시기와 질투를 받곤 했다.


“너흰 왜 안 사귀어?”


가끔 친구들이 그들에게 반농담, 반진담이 섞인 질문을 하곤 했다. 셋은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서로에게 이성적 끌림을 느끼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끌릴만한 일이 없었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볼 것 못 볼 것 보면서 자라왔고, 친남매처럼 커왔으니까.


그들의 관계는 단단한 바위와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일정하게 떨어지는 낙숫물에 구멍이 뚫리고, 바람에 날아온 씨앗이 바위틈을 쪼개 그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아마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언가가, 그런 낙숫물과 같은 사소한 일이 있었다면 아마 다르지 않았을까. 하고 요한은 생각했다.


요한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유민에게 그 이야기를 먼저 했다. 유민은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하지만 요한은 아영에겐 말할 수 없었다. 묘한 감정이었다. 싫다는 요한을 무시하고 유민은 야자가 끝난 후 아영을 굳이 불러내 근처 호프집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콜라와 사이다를 마셨다. 아영 역시 유민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여자는 뭘 좋아하냐면 말이야…어떤 걸 하면 안 되고, 데이트할 땐 어쩌고 저쩌고…"


그런 말이 요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답답했다. 눈과 코가 매워져,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당시 여자친구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진 몰랐지만, 어쨌든 그녀를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고 뭐든 그녀를 위해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영 앞에선 다른 느낌이 들었다. 심장을 무언가로 찌르는 것 같은, 혹은 무언가로 꽉 잡아 쥐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그날 요한은 여자친구가 독서실에서 기다린다며 자리를 일찍 떴다. 유민과 아영은 요한을 놀려댔고, 요한은 가운데 손가락을 그들에게 올린 다음 호프집을 빠져나왔다. 그의 여자친구는 독서실에 없었다. 그날 몸이 좋지 않다며 집으로 바로 향했고, 요한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요한은 담배를 피우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복받쳐 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혼자 토해냈다.


'정신 차려 한요한. 네가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이 관계를 깨트릴 거야?'


…먹먹한 감정을 가지고 요한은 잠에서 깼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다. 술을 마셨고, 아영이 들어왔고, 술을…그 뒤론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요한은 자신의 자취방에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는 텅텅 비었지만 테이블 위에 지갑과 핸드폰과 열쇠가 놓여있었다. 숙취가 심해 이마를 짚으며 억지로 일어나 핸드폰을 쥐고 다시 침대로 몸을 던졌다.


핸드폰에도 별 이상은 없었다. 요한은 통화내역과 카카오톡 내역을 확인했다. 별 특이한 점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번 깬 잠은 쉬이 다시 오지 않았고, 요한은 거북함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 누런 액체를 토해냈다. 먹은 것은 별로 없고, 술을 많이 마신 탓이었으리라.


그의 속에선 계속 정체 모를 누런 액체만 쏟아져 나왔다. 구역질이 끝나자 입을 물로 헹구고 다시 침대에 누워 창가에 놓인 작은 선인장을 보았다. 어제보다 훨씬 더 봉오리는 커져있었고, 그중 두어 개는 곧 꽃을 피울 듯이 끄트머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너희들 꽃봉오리가 맞았나 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요한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선인장을 그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한에게 있어 그녀가 준 선인장은 사랑의 상징이었다. 당연히 자신과 그녀와의 사랑. 그래서 그는 선인장의 꽃을 보고 싶었고, 그 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선인장의 꽃을 피움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좀 더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인장의 꽃은 함께였을 땐 끝내 피지 못했고, 각자가 되어서야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요한에겐 그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누워있던 요한은 몸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커피 캡슐을 머신에 끼워 넣었다. 카페인에 민감한 요한이었지만, 디카페인 커피만은 자주 마시곤 했다. 그의 전 여자친구는 카페에서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고, 음료를 뭐라도 시켜야 했기에 그는 카페인이 없는 커피를 주문했었다. 차 종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자친구와 같이 카페에 가서 달짝지근한 음료를 시키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디카페인 커피만을 마셨다.


"난 카페인이 많이 들어간 걸 마시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래서 디카페인만 마셔."


아마 그녀는 요한도 커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불쌍한 오빠, 커피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카페인이 들어간 걸 못 마시다니.' 그래서 그에게 커피 머신과 캡슐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요한은 선물을 처음 받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한요한,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 싫은 티를 내면 안 돼.'라고.


아직 그의 방에는 디카페인 커피 캡슐이 많이 남아있었다. 저걸 다 마시려면 몇 달은 더 걸릴 것이다. '최대한 빨리 캡슐을 다 쓰고, 머신은 팔거나 과방에 기부를 해야겠다.'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커피머신은 선인장과는 달리 반갑지 않은 사랑의 유산이었다.


커피에 우유를 조금 넣고 의자에 앉아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하늘은 맑았고, 작은 구름이 그 하늘 속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우유를 섞지 않아서 커피와 제대로 섞이지 않은 우유가 구름처럼 보였다. 요한은 손목을 살짝 돌려 커피를 섞었다. 다시 한 모금을 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유민이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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