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요한이 유민의 가게에 도착했을 땐 유민이 가게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벌써 술을 꽤 마셨는지 얼굴이 붉그스름하게 달아올라있었다. 요한을 알아본 유민이 손을 흔들었다.
“여여, 시간 딱 맞춰서 왔네.”
“벌써 좀 취한 거 같은데?”
“닥치고 이리 와, 내 새끼.”
유민이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손을 활짝 벌려 요한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요한을 꼭 안아주며 담배를 문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세상에 여자는 많다. 주변 사람들한테 벌써 괜찮은 여자 좀 소개해 달라고 말해놨어. 소개팅 준비하고 있어.”
“나 헤어진 지 이제 한 달 됐어. 벌써 딴 사람 만나는 거 이상하다구.”
“알아, 아는데 그래도 지… 아니 그 친구도 이제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마음은 좀 섭섭하다 이거지.”
유민이 두 팔을 풀면서 요한에게 천천히 떨어지며 말했다. 요한이 어깨를 다시 으쓱하며 말했다.
“알잖아, 나 어떤 놈인지.”
“알지. 이 시대의… 뭐였냐?”
“이 시대의 ‘필립 말로’. 쿨 하나로 사는 놈이라고.”
“아 그래. 필립 말보로.”
그렇게 이야기하며 유민은 자신의 담배 필터를 가리켰다. 하늘색 말보로였다.
“필립, 말보로. 이것도 캡슐 터트리면 꽤나 쿨 하다고.”
“뭐… 그렇다고 치자.”
요한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유민이 웃으며 요한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들어가서 술이나 마시자. 나도 일 뺐어.”
그들이 테이블로 향했을 땐, 500cc 맥주잔에 다소 괴악한 색의 술이 가득 차있었다. 요한은 본능적으로 그 술잔이 자신의 것임을 직감했다. 요한이 옆 자리에 앉으려 하자 유민은 요한을 잡아끌어 괴악한 술잔이 기다리는 자리에 앉혔다.
“끝내주게 화끈한 소개팅이네. 이거.”
요한이 술잔을 가리키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자 유민이 킬킬거렸다.
“즐거운 소개팅 되세요. 이거, 첫날부터 키스라니 너무 진도가 빠른걸?”
요한이 유민을 노려보고는 잔을 들었다. 온갖 술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별주라 이거지? 맥주, 소주, 아마 색이 뿌옇게 뜬 걸로 봐서 막걸리도 섞어둔 모양이었다. 요한이 잔을 들어 술을 벌컥 들이켰다.
역한 느낌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그는 술잔을 비우고는 쿵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끈적한 단 맛에 코를 때리고 목이 타들어가는는 알코올 느낌이 있는 걸로 봐서 위스키나 테킬라도 적정량 섞어 놓은 것 같았다. 요한의 머리가 핑 돌았다.
“나쁘지 않지? 황금비율로 탔어.”
유민이 안주를 하나 집어서 요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요한이 안주를 먹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영이는?”
“아, 오늘 누가 카페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워가지고 사장한테 엄청 까였대. 그럼 담배를 못 피게 막아야지, 그걸 피게 그냥 두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퇴근이 조금 늦어졌다고 최대한 빨리 온다고 그러더라. 요즘 같은 세상에도 그렇게 담배 피우지 말라는데 피는 사람이 있나 봐.”
유민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마쳤고 그때 한 무리가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술이 꽤 취해있는 듯했고, 가게 사장과 너스레를 떨며 빈 테이블에 앉았다. 그중 한 명이 유민을 알아보고는 그를 친근하게 불렀다. 가게에 자주 오는 단골이자 그와 꽤 친한, 학교의 밴드부원들이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유민이 ‘기타’라고 부르는 남자가 그에게 같이 한 잔 하자고 말하자 유민은 고민도 없이 술잔과 젓가락을 들고 일어섰다.
“야, 혼자 잠시 청승 좀 떨고 있어. 쟤들 오랜만에 왔단 말이야. 잠깐만 놀고 올게.”
유민이 요한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밴드부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요한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유민을 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잔에 소주를 따랐다.
유민은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집이 꽤나 넉넉해서 굳이 알바를 하며 용돈을 벌 필요는 없었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부모님은 여태 나 키워주시고 대학 등록금 내주신 걸로 충분해. 이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유민은 요한과 아영이 굳이 알바를 할 필요가 있냐는 질문에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술집에서 서빙하는 일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유민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 대해 돈을 벌기보단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일을 대충 하지도 않았고, 일을 할 땐 열심히 했다. 유민은 일 머리가 있는 편인 데다 친근한 성격이어서 손님들에게, 특히 사장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사장은 이제 막 30을 넘긴 남자로, 그들은-아영을 포함해서-그를 형이라 불렀다. 호탕하고 의리가 있는 성격이었고 사람 좋아하고 돈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민과 죽이 잘 맞는 게 아니었을까.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민은 밴드부 테이블에 앉아 시끌벅적하게 술을 마셨다. 그들과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술병이 어마어마하게 쌓여갈 때까지 요한 쪽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요한은 그런 유민이 고마웠다. ‘잘 됐네. 뭐. 혼자 술 마시고 싶었는데.’ 요한 역시 유민 쪽으로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고 혼자 술을 마셨다. 안주는 이상하게 당기지 않아서, 그는 소주와 맥주만 계속 마셨다.
"야, 뭐 좀 먹으면서 술 마셔. 속 버린다."
사장, 그러니까 형이 테이블에 소고기 기름이 동동 떠있는 콩나물 국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한이 일어나서 인사를 하자 그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소주 한 병과 술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요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요한의 빈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고는, 자신의 잔에도 소주를 직접 따랐다.
"형이 오늘은 바빠서 같이 이야기는 못 해주겠네. 국하고 이 소주는 서비스야.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술 말고는 다 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형."
"소식 들었어. 힘내고. 예쁜 손님들 오면 슬쩍 번호 따 놓을 테니까 기다리고만 있어."
"말만으로도 감사하네요."
요한이 웃으며 잔을 내밀었고 형도 잔을 내밀어 짠하고 큰 소리가 나게 건배를 했다. 그는 호쾌하게 소주 한 잔을 비우고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요한은 그런 형의 배려가 고마웠다. 안주를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형의 정성을 생각해서 국을 한 술 뜨기로 했다.
콩나물 국은 따듯했고, 평소의 형이 끓이는 것처럼 슴슴하지만 깊은 맛이 났다. 저런 성격의 호남이 이런 슴슴한 간의 음식을 만든다는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게 형의 매력이자 이 가게의 매력이 아닐까. 요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유민과 형은 나름 요한을 배려했는지, 그날 가게의 스피커에선 이름 모를 올드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밴드부 테이블에서 "형, 이런 거 말고 화끈한 노래 들어요. 오늘 이게 뭐야? 실망이에요." 하는 푸념이 들리긴 했지만 유민은 그들을 조련하는데 능숙했기에, 곧이어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색소폰과 같은 관악기의 주장이 크게 들리는 노래들이었다. 요한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혼자서 술만 마셔댔다. 왼 손에 빈 잔을 든 채로 술을 채우려고 술병을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술병을 뺏어 술을 따라주었다.
“저 놈은 자기가 불러놓고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봐 여기요, 잔 하고 수저요.”
아영이었다. 그녀는 막 사장에게 들들 볶이고 온 터라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뒤로 묶은 머리카락이 중간중간에 삐져나와 엉망이었고, 화장도 지저분해 보였다. 유민은 신나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영은 그런 유민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고, 이어 서서 요한의 눈을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야 좀 슬퍼 보이네.”
“항상 슬펐는걸. 요새는.”
“감정도 너무 참고 쌓아두면 병 된다. 우리들 앞에선 울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요한은 혼자서 술을 계속 마신 터라 이미 꽤 취해있었다. 술을 마셔서 감성적이었고, 그래서 그의 마음속의 눈물을 담아두는 항아리는 이미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마 감정이 몇 방울만 더 들어가도 넘쳐버릴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알고 있었다. 그 항아리에서 감정이 넘쳐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그동안 쌓아두었던 감정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요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민은 아영의 잔과 수저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아영이 유민에게 푸념 섞인 이야기 했지만 요한은 술이 취해서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아영은 소주와 맥주 비율을 5:5로 따라서 요한과 유민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은 소주 비율을 더 올려서 자신의 앞에 두고는 잔을 들었다.
“야, 가까이 모여. 잠들고 얼굴 가까이 와봐.”
가까스로 아영의 말을 알아들은 요한은 잔을 들고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가져다 댔다. 요한은 술에 취해 잔을 제대로 들지 못했고 술을 테이블에 흘려댔다.
“우리 쿨병 걸린 요한을 위해서 건배 하자구.”
아영이 소리치며 잔을 앞으로 밀었고, 유민은 웃으며 잔을 앞으로 밀었다. 요한도 배시시 웃으며 잔을 앞으로 밀었고, 세 명의 맥주잔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서로 맞부딪혔다.
요한은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갑자기 메스꺼움을 느끼며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라?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