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고치 - 4

by 에드윈

4.


약속대로 기우는 12시가 되자마자 일을 마쳤다. 그의 손엔 조장이 사 온 햄버거 세트가 있었다. 2층 휴게실로 가서 햄버거를 먹고 소파에 누웠다. 하지만 방금 햄버거를 먹은 데다가 여태 몸을 쓴 터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어폰을 양쪽에 끼고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아서 기우는 몸을 일으켜 점퍼를 입고 휴게실 발코니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우는 담배를 피우며 달을 보았다. 지금 친구들은 뭘 하고 있을까. 밖에서 술을 마시거나, 여자친구랑 놀고 있으려나. 아니면 자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이 처량해졌다. '이렇게 복학하기 전까지 돈을 번다면 1년 동안의 학비는 어떻게든 모을 수 있겠지. 좀 모자라긴 하겠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좀 받는다면 1년 학비에 용돈 정도도 모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친구들은 이렇게 일하지 않아도 학비와 용돈정도는 부모님께 부담 없이 받을 텐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우는 길어진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불공정한 마라톤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시간에 차라리 토익이나 토플 공부를 하는 게 훨씬 내 이력서엔 좋을 텐데. 나중에 이력서에 제과공장 하청업체에서 일했다는 걸 쓸 순 없잖아. 이게 무슨 시간낭비야.'


기우는 필터까지 타들어오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버리고 다시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오다가 넓게 흝어졌다. 하늘이 맑아서 달이 밝았다. 기우는 달을 보면서 담배를 반 정도 피고는 휴게실로 다시 들어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들이 기우의 잠을 방해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몸은 기우를 깊은 꿈 속으로 이끌었다.


-


어린 기우는 그날 학교가 끝나고도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300원을 모은 다음, 그것으로 맥주 모양의 사탕과 떡볶이 한 컵을 구멍가게에서 샀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집 근처 놀이터로 갔다. 놀이터에 도착했을 즈음 떡볶이는 이미 해치웠기에 기우는 바로 사탕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네에 앉아 신발로 바닥을 파면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던 놀이터였지만 노을이 지자 하나둘씩 놀이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 즈음, 기우는 그네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에게 왜 말도 없이 늦게 들어왔냐며 혼날까 봐 무서워서 집 주위를 뱅뱅 돌았다. 날이 추워지고, 배도 고파서 결국 대문을 열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하자 그날 아침에도, 전날 저녁에도, 아니 3일째 먹던 된장찌개 냄새가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기우는 조심스레 집 문을 열었다.


"다녀왔어요."

"왔니? 어디 갔다 왔어? 빨리 손 씻고 밥 먹어."


혼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머니는 다정하게 말했다. 기우는 가방을 방에 두고 손을 씻은 다음 부엌으로 향했다. 동생과 어머니는 벌써 저녁을 먹었는지, 데워진 된장찌개와 김이 솔솔 올라오는 밥이 하나씩 식탁에 올라있었다. 기우는 잘 먹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한 뒤 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기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우야, 과학상자 있잖아. 엄마가 다음에 사주면 안 되겠니?"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였다. 과학상자에 대한 미련을 거의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자 다시 눈앞에 과학상자가 어른거렸다. 동시에 화가 났고, 모든 것이 싫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고 코가 매웠다.


"왜? 우리 집이 가난해서?"

기우는 어머니의 눈을 차마 보지 못한 채 식탁보의 무늬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다음 달에 꼭 사줄게. 이번 달엔 영지 돌도 있고, 돈 나갈 일이 많아서 그래."

"나 벌써 과학상자 대회 신청했어. 과학상자 없으면 쌤한테는 뭐라고 말해? 우리 집 가난해서 엄마가 과학상자 못 사준다고 말해?"


순간 기우의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 시선을 식탁보에서 어머니의 얼굴로 돌렸다. 어머니가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다. 기우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얼굴을 향해 눈을 굴렸다. 기우의 눈에 어머니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마음을,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화가 아니었다. 미안함이었다.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할게. 취소해 달라고."

"그럼 난 쪽팔려서 학교를 어떻게 가? 그러면 쌤은 우리 집이 거지라고 생각할 거 아냐."

"기우야. 다음 달에 꼭 사줄게. 엄마가 약속할게."

"몰라. 난 우리 집이 싫어."


기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방문을 잠갔다. 그의 동생은 책상에 앉아서 숙제를 하고 있었고 기우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방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기우는 애써 모른척하며 눈물을 흘렸다. 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리자 기우가 큰 소리로 "문 열어주지 마!"라고 외쳤다. 동생은 기우의 말을 듣지 않고 문을 열었고, 그의 어머니가 침대에 앉는 느낌이 들었다.


"기영아, 잠시 나가 있을래?"

그때 이불 너머로 어머니의 손이 느껴졌다. 그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별말 없이 기우를 그렇게 쓰다듬어주었고, 기우는 서러움에 몸을 떨며 흐느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쓰다듬어주었고, 기우는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불을 걷어차고 "죄송해요."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동시에 분한 마음이 들어 이불을 덮은 채 눈물만 흘렸다.


기우는 그때 결심했다. 다시는 부모님께 무언가를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


"기우야, 일어나. 퇴근해야지."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기우는 일어났다. 이훈이었다. 기우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시계를 봤다. 5시 50분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이훈에게 물었다.


"일은요?"

"5시쯤에 다 끝내고 작업장 청소하고. 이제 다 퇴근할 준비하고 있어."

기우는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과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밤새 소파에서 잠을 자서 온몸이 욱신거렸다. 이훈과 함께 일 이야기를 하며 사무실로 내려와 가방을 챙겼다.


"내가 태워줄까?"


점퍼를 입으며 이훈이 기우에게 물었지만 기우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아뇨, 저 그냥 통근버스 타고 가면 돼요. 다음 주에 봐요 형."

"알겠어. 다음 주에 꼭 보자. 집에 가서 푹 쉬고."

이훈은 '꼭'을 힘주며 말했다. 그는 손을 흔들며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고 기우는 통근버스 쪽으로 향했다. 토요일 새벽의 통근버스는 한산했다. 대부분 6시 전에 일을 마치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오거나, 카풀을 해서 버스를 타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우는 버스 중간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던 밤하늘과는 달리 먹구름이 멀리서 몰려오고 있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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