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고치 - 3

by 에드윈

3.


기우는 저녁을 먹고 동생과 숙제를 한 뒤 일찍 잠에 들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친구와 같이 만든 과학상자가 눈 앞에 어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동생은 기우의 옆에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기우는 잠을 계속 뒤척이다가, 아버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부엌에서 다시 된장찌개 냄새가 났고, 아버지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엄마가 아빠한테 과학상자 이야기를 하겠지?'


그 생각이 들자 눈이 더 또렷하게 떠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부엌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고 수저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우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과학상자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나가서 아빠한테 사달라고 이야기를 해야하나?'


기우가 조바심을 내고 있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여보, 기우가 과학상자를 사달라고 하네."

"그게 뭔데?"

"나도 잘 몰라요. 무슨 대회를 나가고 싶대요."

"우리가 그런거 살 돈이 어디있어. 그냥, 다음에 사준다고 그래."

"그래야겠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그때 기우와 동생의 방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낡은 침대와 이불, 곰팡이가 슨 벽지,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르는 책들로 가득한 책장, 다 쓴 볼펜을 끼운 몽땅연필. 그리고 아까 저녁식사때의 어머니의 한숨과 표정이 생각났다. 기우는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왜 나는 과학상자를 가질 수 없는걸까, 왜 우리 집은 가난할까.'


기우는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머릿 속이 복잡했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수치심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유리창이 주홍빛으로 달아오를때까지, 기우는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어머니가 그와 동생을 깨웠고, 기우는 잠에서 막 깬 것처럼 연기를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학교에 가고 싶지가 않았기에 부모님께 아프다고 칭얼댔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기우는 어쩔 수 없이 동생과 함께 학교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때 유인물을 나누어주었다. 유인물은 '교내 과학상자 대회'를 소개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 신청서가 같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의 친구가 어깨로 기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거봐, 진짜지?"라고 말했고, 기우는 겨우 웃으며 "그러네."라고 대답했다.


그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망설임없이 자기의 이름을 썼고, 기우는 차마 그 유인물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했다. 그는 과학상자를 가질 수 없는 가난한 소년이었고, 참가하겠다고 신청서를 냈다가 나중에 과학상자가 없어서 대회에 못간다고 말하는 창피를 당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친구는 계속 기우를 부추겼고, 기우는 "엄마한테 물어보고 내일 낼거야."라며 대충 둘러댔다.


"야, 이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엄마한테 물어볼게 어딨어. 그냥 이름써서 지금 내자. 내일 참가 인원이 다 차서 너 참가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나 아직 과학상자가 없어."

"어제 아줌마한테 사달라고 안 했어?"

"했는데, 생각해보신다고 그랬어."

"너희 집 가난해? 과학상자도 안 사줘?"

"몰라."


가난이라는 말이 기우의 가슴에 비수로 날아들었다. 친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신청서를 조심히 잘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신청서를 선생님에게 내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기우는 친구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의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된 친구의 표정을 보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힘드니까 별 생각이 다 나네.'


기우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가 어렸을 때 집 형편이 어렵긴 했던 것 같았다. 남들이 한 번은 다닌다는 학원도 다닌 적이 없었고, 학습지를 해본 적도 없었다. 좋은 옷을 입어본 적도 없었고 그와 동생의 옷은 친척 형들이 입던 옷을 물려 입거나,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온 싸구려 옷을 입는 것이 전부였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들어갔었을 때, 그는 생각했다. '1학년은 몰라도, 전역하고나면 꼭 학비는 내 돈으로 내겠다고. 더 이상 부모님께 신세지고 싶지 않다.'라고.


"기우야, 담배 한 대 피러가자. 이제 너도 좀 쉬어야지."


이훈이 웃으며 그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기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둘이나 빠져도 괜찮아요?"

"방금 생산쪽에서 연락이 왔어. 파이쪽에 문제가 있어서 30분 있다가 다시 내려올거래."

"그럼 좋죠."


기우와 이훈은 땀에 젖은 목장갑을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고 공장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둘의 몸에서 김이 연하게 올라왔다. 이훈이 담배의 불을 붙이며 말했다.


"야 우리 열심히 일하긴 했나보다. 몸에서 김이 나네."

"그러게요, 좀 뿌듯한데요?"

"자식, 너 진짜 22살 맞아?"

"민증 보여드려요?"


기우가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둘은 건물 귀퉁이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포도맛 웰치스와 함께 담배를 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희미한 별들과 함께 달이 보였다.


"우와, 좀만 있으면 보름달이 뜨겠어요."

"그러게, 달이 꽤 크네."


둘은 아무말 없이 담배를 피며 달을 바라보았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기우였다.


"형, 형은 왜 여기서 일하는거에요?"

"난 너처럼 대학 갈 형편도 머리도 안되니까."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다른 곳도 많잖아요. 왜 하필 여기에요?"

"이젠 편해졌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하다보면 대기업 정직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산직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지만, 경력이 쌓여 조장이 되고 근무연차가 길어지면 기업에서 정직원으로 채용한다는 이야기를. 일일 생산표를 가져다 주는 아주머니도 그런 식으로 정직원이 되었다고 2조 조장이 기우에게 이야기해준 적도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 품질관리 쪽에서 일하는 정직원이라고 이야기를 덧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기우는 이훈이 멋있어보였다. 복학을 할 계획이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며 걸어가는 이훈이, 그리고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그가 기우에겐 멋있어 보였고 또 진짜 어른처럼 보였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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