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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Sep 01. 2022

예쁘다는 말이 듣기 싫은 이유


간단한 인터뷰를 하나 했다. 다양한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방송으로 제작하고 있는데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냐는 후배들의 부탁에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시간을 냈다. 대학에서 좋았던 경험과 안 좋았던 경험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다가 따로 불러내 성적인 농담을 하던 사범대 교수님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우수한 강의와 인자한 모습으로 평판이 좋은 분인데 "넌 남자와 많이 자본 것 같다"는 말로 날 놀라게 한 분. 후배들은 듣는 내내 경악하더니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가 너무 예쁘셔서 그래요.


그 말은 갑자기 며칠 전 나눴던 대화를 상기시켰다. 독서 모임에서 미투 운동에 관한 화제가 나왔고,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온 남자분이 한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밤길을 걸어가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성범죄가 너무 많이 일어나자 학교에서 대책 위원회를 열었다.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좀 조심해야 한다", "여학생들에게 스쿨버스를 타게 하자"는 피해자 중심의 논의가 이뤄지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한다. 가해자인 남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반대로 남학생들이 스쿨버스로 귀가하면 어떻겠냐고. 실제로 그 안건이 통과돼 남학생들은 좋든 싫든 한동안 스쿨버스를 탔다고 한다. 한국이었으면 역차별이다 뭐다 우후죽순 반론이 제기돼 통과되지 못했을 안건이다.


예뻐서 성희롱을 당한 거면 외모를 못나 보이도록 하는 게 해결책이 될까? 그런데 내 주위에 살면서 성범죄를 당하지 않은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럼 그 여자들이 모두 예뻐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사한 예로 강간당한 여자에게 "그러니까 네가 조심했어야지"라고 조언하는 게 적절할까? 그럼 낮 시간대에 발생하는 강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두운 밤길이 무서워 매일 친구와 다녀도 막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조심했다면 살면서 이런 일을 모두 피해 갈 수 있었을까? 결국 피해자가 조심하고 말고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나한테 표적을 돌리는 것처럼 들려."

"언니. 저는 그냥 칭찬을 한 거예요."


후배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분위기는 잠시 어색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게 "예쁘다"는 말은 기분 좋은 칭찬이 아닌 듣기 거슬리는 말이 됐다.



누군가는 스스로 즐겁기 때문에 외모를 가꾼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왜 뷰티 산업의 매출을 올려주는 대부분의 고객이 여성일까. 왜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 습관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대체로 여성일까. 여성들도 하나같이 각기 다른 사람인데 왜 스스로의 외모 단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예뻐지지 못해 안달일까. 이는 사회가 여성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못생긴 여자가 어느 날 아름답게 변신해서 사랑받는 TV 드라마 속 장면도, 신뢰 가는 이미지의 나이 든 남자 아나운서와 젊고 예쁜 아나운서가 함께 보도하는 뉴스도, 고객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 한다며 립스틱 색깔까지 규정했던 서비스업에서의 근무 경험도, 화장을 안 하고 가면 무슨 자신감이냐며 매너가 없다고 평가하는 남자 동기들도 모두 우리 일상의 단면이다. 왜 사회는 개인의 취향을 넘어 여성에게 높은 외모 기준을 정해놓고 요구하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 있는가.


얼마 전 호텔 수영장에서 한 중국인 남자와 잠시 대화를 나눈 적 있었다. 그는 다음날 우연히 또 마주친 내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내 친구들이 너 예쁘대. 근데 물어볼 게 있어. 한국 여자들은 모두 다 성형한다며? 사실이야?"


난 성형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내게 예쁘다고 했는데 왜 기분이 불쾌했을까? 사람들이 예쁘다는 말을 건네면 기뻐해야 할까? 언젠가부터 기분이 되레 찝찝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여성에게 예뻐져야 한다는 강박을 주입하고 거기서 남성은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 여성은 자신의 외모를 뜯어보며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남성은 그걸 예쁘다고, 못생겼다고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예쁘다는 건 위험을 담보하기도 한다. 여성이 가슴과 다리 등 신체 부위를 노출하는 건 섹시하고 예쁘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만약 남성이 노출된 신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면 머릿속에 위험한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가? ‘일반인 여성 몰카’의 대상이 되어 누군가의 단체 카톡방에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연히 아는 오빠가 단톡방에서 모르는 여성의 사진을 두고 “꼴린다”고 품평한 걸 본 적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수많은 피해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쁘다는 것과 위험하다는 것의 경계를 딱 잘라 나눌 수 있을까? 여성을 둘러싼 이 모든 현상이 얼마나 기이한지 나만 의문이 드는 걸까?


덧붙이자면, 만약 잘 보여야 하는 직장 상사나 교수라면 남성은 여성의 외모에 대해 면전에서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더 예쁘다”, “머리 길면 더 예쁘겠다”, “너무 말라서 살이 좀 쪄야 예쁘겠다” 등 외모를 평가한다는 건 상대를 인간적으로 존중한다기보단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전 예쁘다는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외모는 남들의 평가가 필요 없는 개인적인 영역이잖아요. 누군가 외모에 관한 칭찬을 건네면서 좋아하는 반응을 기대하는 게 느껴지면 불편해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게 변화의 시작이었다. 예전엔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한 영역이었으나 이젠 아무렴 상관없었으면 했다. 반면 내가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건 이런 것들이었다. 이상하고 불평등한 일들을 좀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는 것.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 완벽히 갖춰지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것. 살면서 겪은 실패와 기울인 노력, 그로 인해 얻은 소중한 것들을 중심으로 내 이야기를 쓰는 것.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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