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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Aug 30. 2022

브래지어는 입지 않는다


"진표야, 너 브런치 작가잖아. 여기저기서 좋은 제안 들어온 적 없어?"

"나는... 스토킹 당한 피해자 인터뷰, 노브라로 사는 여자 인터뷰처럼 돈 안 되는 제안만 들어오던데."

이 기사에선 '자유롭고 싶은 29살 이모씨'로 다뤄졌다.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21091511008029839


"악, 맨날 부정적인 이야기만 쓰니까 그렇지. 안 한다, 포기한다 이런 것 말고 성공담을 좀 써봐."

딱히 성공담이 없는 나는 늘 남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없는 인터뷰만 한다. 회사에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으나 5년 넘게 꿋꿋이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것도 어디 가서 내세울 수 있을까.






더 이상 브래지어를 입지 않기로 결심한 건 대학교 3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동아리에서 만난 오빠가 <이갈리아의 딸들>이란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준 적 있다. 남성이 사회적 약자가 된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 가상 세계인 이갈리아에서 모든 권력은 여성이 쥐고 있고, 남성은 집에서 살림과 아이를 도맡는다. 여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등 우리 사회와는 반대로 남성이 부당한 위치에 놓여 있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감싸는 거추장스러운 속옷 ‘페호’를 입어야 하는 것도 이야기 속 설정 중 하나다.


그동안 브라는 단순한 속옷이라고 여겼으나 책을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성별마다 갖고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으나 남성은 성기를 불편하게 옥죄는 속옷을 입지 않는다. 남성의 유두 노출에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거부감을 덜 느낀다. 브라는 여성의 낮은 지위를 보여준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었다.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또한 비슷한 메시지를 건넨다. 주인공 영혜는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위에서 굉장히 유별난 사람으로 인식된다. 편이 되어줘야 할 남편조차 영혜의 노브라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노브라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걸까? 내 신체를 아프게 압박하는 속옷을 입지 않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책을 덮고 나자 더는 브라가 입기 싫어졌다. 가슴 통증을 유발하는 신체적 불편함뿐만 아니라 이젠 정신적 불편함까지 느껴져 갑갑했다. 하지만 관성을 깨는 건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도 브라를 입는 게 나을지 잠시 고민했다. 분명 어릴 때부터 입어야 한다고 교육받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슴 처짐을 방지하는 것과 옷맵시를 살린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었다. 심지어 노브라가 가슴 처짐을 더 막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난 궁금했다. 그럼 사람들은 대체 왜 브라를 입는 걸까?



채사장의 수필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선 ‘낡은 벤치 이야기’가 나온다. 새로 부임한 대대장은 부대를 시찰하던 중 낡은 나무 벤치 하나를 발견한다. 2명의 병사가 벤치 주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대대장은 무엇을 위한 근무인지 묻지만,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는 이상하다고 여기지만 함부로 없앴다가 불똥이 튈까 그대로 놔둔다.


알고 보니 오래전 병사들의 쉴 공간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벤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업무가 바빠 아무도 앉아서 쉬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 벤치는 빛을 바란다. 상급부대 연대장이 부대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에 부대에선 벤치를 급히 페인트칠한다. 페인트가 마르기 전 혹시 누가 앉아 더러워질까 봐 1명의 병사를 배치한다. 훗날 인근 부대서 사고가 발생해 모든 경계 근무를 2인 1조로 강화하라는 지침이 내려오고, 부대의 규칙과 질서는 꾸준히 이어진다. 이게 바로 2명의 병사가 오랜 시간 벤치를 지키게 된 이유다.



대부분은 그냥 낡은 벤치를 없애기 좀 그래서 브라를 입는 것 아닐까? 여자라면 입어야 한다고 들으며 자랐고, 실제로 주위 모든 여자가 입으니까. 다들 브라를 입지 않는 건 '좀 그렇다'고들 했다. 딱히 어떤 문화를 고수해야 할 논리는 없지만 이미 관성적으로 굳어졌을 때, 변화를 감수하고 싶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좀 그렇다며 반대하곤 한다.


"신입인데 나서서 분위기를 띄워야지. 가만히 앉아있으면 좀 그렇잖아."

"그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애인도 없으면 좀 그렇잖아."

"그래도 교수님이 시키신 건데 나서서 반대하면 좀 그렇잖아."


듣고 보면 참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좀 그렇다는 건 대체 뭔가? 반대를 할 거라면 왜 뚜렷한 근거와 함께 '싫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건 내세울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언제나 다수의 사람이 옹호하는 관습이 있고, 그 관습과 나 사이엔 받아들일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선택'이 존재한다. 어떠한 관습도 개인보다 중요하진 않다. 결과를 책임질 수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더 편한 방식을 선택하면 된다. '좀 그렇다'는 애매한 말로 행동을 제한하는 건 자유로운 선택의 범위를 좁힌다.


'좀 그렇다'는 표현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가짓수를 늘리기로 했다. 물론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도 있고, 피곤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모든 걸 따라야 한다고 순응했던 때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지 않을까. 옷장을 정리하다 갖고 있던 브라를 모두 버렸다. 아무래도 계속 브라를 입는 건 바보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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