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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Oct 21. 2021

불편한 관계는 모두 정리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대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창 각종 술자리에 부지런히 얼굴을 내비치던 때가 있었다. 학생 때 맺는 인맥이 사회에 나가서도 중요하다며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SNS에 찍히는 ‘좋아요’ 숫자가 올라가면 덩달아 내 가치가 올라가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어딘가 공허했다. 사실은 피곤하고 지루했다. 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늘어놓는 남들의 연애 얘기나 험담, 동아리의 앞날 같은 것들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신입생인데 듣기 싫은 얘기에 귀를 닫기보단 경청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어중간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유난히 활달하고 재밌기로 소문난 오빠가 사람들을 모았다. 딱히 바쁜 일이 없던 나는 가는 길에 붙잡혔고, 오빠 옆에서 연신 소주를 마셨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학생들을 가르치는 봉사 활동에 가야 했던 터였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조용히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저 내일 가르치는 학생들 만나러 가야 해서 이만 일어날게요.”

오빠는 손목을 붙잡았다. 쉽게 놔주지 않으려는 기색이었다.

“무슨 학생들?”

“다문화 가정 애들인데 봉사 활동이에요.”


오빠는 갑자기 “이런 애들 아냐?”라고 물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지적 장애인을 흉내 낸 듯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머리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그 오빠를 바라본 채 깔깔대고 있었다. 이게 웃기다고? 정신없는 새를 틈타 화장실에 가는 척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가는 길, 어렴풋이 생각했다. 원래 사람이 많이 모이면 형식적이고 낮은 수준의 대화가 오가는 게 아닐까.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대신 혼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그런 내게 한 언니가 다가와 물었다. 넌 왜 매일 혼자 있는 거냐고. 난 웃으며 그냥 이게 더 편하다고 했다. 태연한 나와 달리 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앞으로 학교 다니면서 선배들에게 도움 받을 일도 많을 텐데 벌써 그렇게 소외되면 어떡해. 아니면 연애라도 해. 1학년 때가 가장 인기 많을 땐데 아깝지 않게 보내야지.” 난 누군가 구하지도 않은 조언을 건넬 때면 늘 불통이 된다. “네, 언니. 알겠어요.”라고 말한 뒤 약속이 있어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문득 궁금해졌다. 수많은 관계와 얽혀 살아가는 지금, 그 속에서 온전히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왜 거추장스럽게 편하지도 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 어느 순간 불편한 관계를 모두 정리했는데, 뜬금없게도 그 계기는 ‘구두’였다.



신던 신발이 다 해져서 인터넷으로 구두 하나를 샀다. 여러 가지를 보고 비교하기도 귀찮아 그냥 후기가 많은 제품으로. 막상 배송이 오니 어딘가 맘에 안 드는 신발이었다. 직접 보니 내게 안 어울리는 탁한 분홍색이 특히 맘에 들지 않았다. 그 구두를 신고 나간 날이면 자꾸만 착장이 신경 쓰여 차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여러 번 쳐다보곤 했고, 결국 좋아하는 다른 매장에서 라벤더 빛깔의 구두 한 켤레를 또 샀다.


이 정도면 무난하니 괜찮겠지 싶은 제품은 좀처럼 착용하는 날이 없다. '행인 3 역할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하고 나가겠어'란 마음을 품지 않기 때문일까. 매일 비슷한 날들일지라도 좀 더 특별하게 꾸미고 싶은 날이 대부분이기에 무난한 아이템은 늘 옷장 구석을 꿋꿋이 장식한다. 단호하게 갖다 버리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서고 나면 그 오빠처럼, 언니처럼 어딘가 힘이 빠지는 만남이 있다. 그 사람이 내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 단칼에 끊어내긴 어려운데, 그렇다고 연락 오는 족족 나가서 비위를 맞추기도 내키지 않는다. 몇 번씩 피하다가 한 번쯤은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꽤 괜찮은 연주를 시도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삐걱대는 불협화음만 낸 뒤 집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면 집에 오는 길이 평소보다 훨씬 멀게 느껴진다. 혼자 있을 때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끼며 애꿎은 핸드폰 전화번호부만 훑어볼 뿐이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평범한 구두를 사느라 돈을 다 써버렸다면 정말 사고 싶었던 라벤더 빛 구두를 사지 못했겠지. 이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로 일상을 채우다 보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들에게 집중할 힘을 잃지 않을까. 아니면 더 사랑할지도 모를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놓치거나. 단지 나쁘지 않은 것들로 인생을 채우는 건 행복해질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구두 하나인데 뭘 그리 신경 쓰냐고, 그래도 먼저 찾아주는 사람인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넘기기엔 마음이 석연찮다. 난 그리 무던한 사람이 아니니까.


새로 산 구두를 신고 걸을 때마다 마치 운명처럼 이 신발을 발견한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했다. 사랑할 수 없다면 의무감만으로 노력하지 말아야지. 밥 한번 먹자는 연락도, 얼굴 한 번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연락도 반가워서 빨리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무시해도 괜찮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을 늘리려는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생각을 계기로 불편한 관계를 다 정리했다.


남는 시간, 가장 돈독히 관계를 맺고 싶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되도록 외로우려 했다. 혼자 책을 읽고, 카페를 가고, 여행을 떠났다. 마음이 엉켜있을 때면 더더욱 외롭고 싶었다. 그럴 땐 누군가의 사소한 불평도 독을 내뿜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의도치 않게 괴롭힐 수도 있는 일이다. 스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내 것을 쏟지 않고, 진짜로 소중한 관계를 맺기 위해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남들은 다 아는 정보를 놓칠 때가 많았지만 이만하면 평화로운 대학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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