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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Sep 03. 2022

쓰레기 같은 상사와 일하지 않는다

교육을 업으로 삼으려고 한 적은 없으나 나름대로 열정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교생 실습을 그만둔 뒤에도 계속 교육 회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회사 생활 경험이 전무할 때라 시급과 하는 일 정도만 확인한 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었다. 학교 공부와 병행하며 별생각 없이 주어진 일을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따르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늘 충전되는 기분이었고, 대학에선 나도 학생이었지만 밖에선 선생님으로 강의를 한다는 게 재밌어서 오래 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40대 남자였던 팀장님이 어려운 건 없는지 자주 물어보시며 챙겨주셨다. 팀장님은 아름다운 말을 자주 하셨다.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서 교육업에 종사한다고, 사원들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돈 욕심 없이 일한다는 팀장님. 한 번은 회사에서 업무에 필요한 도구를 지원해 주지 않았는데 직접 사비를 털어 선물해 주셨다. 인품이 훌륭한 분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팀원들이 자꾸 한 명씩 사라진다는 게 이상했다. 한 번은 곧 일을 그만둔다는 동료 H에게 인사차 연락을 했다. 모두 재택근무였고, 업무 이야기는 팀장님 하고만 나누면 됐기에 사실 사라지는 팀원들과 평소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H에겐 업무적으로 몇 차례 도움을 받았고, 가끔 공식 일정에서 만날 때마다 친해지고 싶던 터라 아쉬웠다.


"H,  그동안 고마웠어요. 좋은 인연이었는데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H는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연락해줘서 고마워요. 저 3일간 집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팀장님이 너무 힘들었지만 잘 지내보려고 마음을 열고 다가갔는데 부정적인 에너지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계속 눈물이 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제가 H 있는 쪽으로 갈까요?"

"아니요. 혼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와주겠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괜히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횡설수설 말하는 그의 모습. 꺼림칙했으나 그냥 서로 잘 맞지 않아 갈등이 있었겠다고 넘겨짚었다. 다시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H에 관한 기억은 금세 잊혔다.



고작 6개월 정도를 일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내가 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원이 됐다. 다들 이렇게 빨리 그만두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 팀장님은 어느 순간부터 내게 자꾸만 미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팀을 끌고 나가는 사원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학사 일정이 끝나면 일하는 시간을 더 늘리는 게 어때요?"

그러나 여긴 내게 임시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기에 뭐든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전 올해 학생들 수능까지만 마무리하고 그만둘 생각인데요."

"그래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년까진 계약 해지 처리를 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이건 합의해줄 수 없어요. 2년 이상은 일하는 게 의무입니다."

정말 이상했다. 나와 잘 지내던 그가 날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제가 촉이 좋은 편인데 진표 씨는 다른 일을 해봤자 잘 안 풀릴 것 같아요. 살면서 여기서 나가서 잘 된 사람을 못 봤어요. H는 지금 최저 임금이라도 받나 모르겠네요."

"일을 그만두는 건 우리 관계를 다 끊고 가는 건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전 앞으로 진표 씨의 인생을 코칭해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예전에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죠? 진표 씨 나가면 제가 회사에 진표 씨 사생활에 대해 소문낼까 하는데요."


계약 해지에 관한 얘기를 꺼낸 뒤로 팀장님이 종종 전화해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그 말들이 하나하나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려 했지만 이젠 대응을 해야 할 때다.

"개인적인 권한을 남용해 부하 직원을 잡아두는 조직이라면 제가 여기서 뭘 배우라고 남아있으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동안은 업무적인 도움도 많이 받고 감사한 점도 많았으나 최근 자꾸만 월권행위를 거듭하시는 게 불쾌합니다.”

"우린 그동안 사이가 좋았고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진표 씨가 계약 해지 얘기를 꺼낸 시점부터 다 문제가 되는 거예요. 진표 씨 마음이 변한 게 문제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뭐지? 호기심이 든 나는 사라진 사원들에게 모두 연락해 팀장님에 관해 물어봤다. 진술은 한결같이 일관적이었다.

"예전에 한 분이 그만두겠다고 하자, 그럼 시스템 상에 개인 정보만 남겨두면 안 되겠냐고 매일같이 물어봤어요. 관리하는 사원수에 따라 성과급을 받으니 어떻게든 실적을 늘리려고 한 거죠.”

"일 정리할 당시 그 새끼 때문에 우울증 걸려서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다른 사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떠들길래 불편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제 마음이 문제라고 했어요."


어떻게 일개 팀장이 나가는 사원의 행정 처리까지 담당하냐며 누군가는 글의 진위 여부에 딴지를 걸겠지만, 세상엔 독특한 시스템의 회사도 있다. 별로 좋은 일자리도 아니었고 그냥 그만두면 됐지만 가르치는 학생들과 수능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의도한 대로 끝까지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부당한 건 버티지 않겠다고 쉽게 포기하는 건 이미 해봤으니 말이다.


"앞으로 두 달은 더 일할 예정인데 그동안 제 개인적인 선을 넘지 마세요. 팀장님이 제게 했던 모든 말이 과연 적절한 지 모르겠어요. 사내 게시판에 올려 반응을 살펴볼까 합니다."

"조용히 정리하시고 앞으로 팀 내 다른 사원들과 연락 주고받지 마세요. 이건 의무입니다. 의무를 어기면 저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아직까지 팀장으로 일하는 건 요구대로 모두가 조용히 정리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건 피곤한 일이고 득이 될 게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떠나기에 저 사람 밑에서 불필요한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이들이 계속 생기는 것이다. 난 그게 싫은데? 그래서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다른 사원의 진술을 모두 모아 관리자 W를 찾아갔다. 개중엔 자신의 실적을 조작하는 등 공금횡령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 예전에 팀장님이 해당 사안을 자연스럽게 언급하며, 사내 다른 분이 조언해준 대로 일을 처리하는 거라고 했기에 원래 회사 자체가 근본이 없는 곳인가 싶었다. 하지만 신뢰가 깨진 뒤 미심쩍던 것들을 모두 찾아보니 회사 규정에서는 분명히 팀장님의 행동을 금하고 있었다. 그때 알아차렸다. 이 분은 뭐든 자의적으로 해석해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구나. 나이 먹고 언제까지 저렇게 살 건가.


관리자 W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말했다.

"저 이 회사에 꽤 오래 있었는데요. 사안이 이렇게 심한 경우도, 진표 씨 같은 사람도 처음 봐요. 보통 쌓인 원망으로 흥분해서 대화가 잘 안 되기 마련인데요."

"화내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쓰레기 같은 상사는 본인도 당해봐야 알죠. W 덕분에 잘 정리할 수 있었어요. 행복하세요."


시간이 흘러 새 시작을 하고 있을 때 팀장님이 최종 해고 처분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팅 이후 회사에선 팀장님의 과거를 살피는 동시에 이후 행적을 주목했고, 난 모든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문제가 되는 게 많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혹시나 팀장님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아무리 사회 초년생이더라도 자꾸 건드리면 본인도 다칠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하기 싫은 것, 그래서 하지 않는 것의 목록에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을 참는 것. 조직 생활을 잘하는 사람 말고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더 바람직하게 느껴졌다. 설령 직접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억울하게 피해를 겪은 이가 있다면 그 편에 서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팀장님은 해고된 뒤 뜬금없이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정신 차리고 똑바로 좀 살라고 말씀드리자 '평생 기억할게요.'라고 하셨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저도요.'라고 쓴 뒤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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