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꽤나 성실히 오래 다녔다. 같은 학과에 학점이 우수한 친구들은 빠르게 졸업해 교수님이 소개해 준 일자리에 취업했으나, 난 성적이 3점대로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데도 별생각 없이 남들보다 1년 반 정도를 더 다녔다. 4.5 만점도 몇 번 받은 걸 보고 주위 사람들은 대기업을 목표로 치열하게 노력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좋은 학점을 받아서 어딘가에 유용하게 써야겠다는 생각도 딱히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듣고 싶은 수업은 다 들었고, 인문고전 스터디를 만들어 자유론, 군주론, 도덕 감정론 같은 책들을 읽었다.
누군가 내게 "학점이 좋은데 전공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냐"라고 물은 적 있었다. 일단 취업 시장에서 살리기 어려운 철학 전공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 전공을 살린다는 건 이런 거였다. 적절한 근거와 함께 자기 생각을 담아 배운 내용을 전개하는 것, 거기서 연결고리를 찾아 일상 속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하는 것. 즉 공부를 살아있는 지식으로 만들어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난 이미 전공을 잘 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계가 도입된 뒤 노동자가 시스템의 부품으로 취급되는 현상을 두고 마르크스는 '노동 소외'라 지칭하지 않던가. 여기서 노동자는 생산물의 주인이 될 수 없고, 고용주가 제시한 임금을 받을 뿐이며 노동 과정서도 자율성이나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내가 지식과 소통할 수 없다면, 지식이 내 안에 스며들지 않고 단순히 하나의 스펙으로만 쓰인다면 그건 '공부 소외'인 것 같았다. 겉으론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였지만 늘 내 안엔 이상하고 남다른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질 좋은 일자리가 청년 세대 1순위 고민으로 떠오른 시대에 어리석은 소리만 지껄이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는 친한 교수님이 7급 공무원 지역인재전형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일반적인 공개 채용만큼 치열하지 않으며,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이 있으면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만약 승낙했으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하다. 더 좋은 인생을 누리고 있을까? 난 고민도 해보지 않고 싫다고 말씀드렸다.
"졸업하면 아르바이트 하면서 한동안 책을 더 읽고 싶어요. 글 쓰고 여행도 다니고요. 학교에선 학사 일정을 쫓느라 바빴어요. 교정을 떠나면 저를 돌아보며 나아갈 방향을 정할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을까.
"말릴 생각 하나도 없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네 나이 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좀 부럽네."
너무 경솔한 결정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 그랬다. 우리의 뇌는 충분히 똑똑해서 직관을 따르는 게 현명할 때가 많다고. 아마 시간을 두고 고민했어도 공무원으로 사는 건 여전히 싫었을 것이다. 살면서 공무원이 일하는 걸 보고 부럽다거나 멋지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그냥 지루해 보였고, 내겐 지루한 일을 끈기 있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공무원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안정성 같은 가치가 딱히 탐나지 않기도 했다.
그럼 내 삶엔 뭐가 중요한 가치일까? 잘 모르겠지만 그걸 찾고 싶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나 자신도 납득하지 못한 채 남들과 함께 취업 준비의 대열에 서고 싶지 않았다. 여러 사람과 같은 길을 걷는 건 안정감을 주지만 결국 획일적인 틀에 나를 맞추는 과정이다. 한 번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이를테면 면접에서 면접관이 본인의 단점을 말해보라고 한다. 이는 자주 나오는 질문 중 하나이며, 여기서 모범 답안은 ‘장점 같은 단점’을 얘기하거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란 것. 완벽주의가 있어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있지만 그게 꼼꼼함으로 발현되고, 성격이 내성적이지만 고쳐보기 위해 리더 활동에 자원한 경험 같은 걸 말하는 게 듣기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인사담당자도 단점이 없어서 저 자리에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또 난 단점을 극복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성적이면 가급적 밥은 혼자 먹고, 2차 회식 땐 불참하는 식으로 회사 생활을 하겠다고 답하면 안 되나? 그게 문제가 되는 걸까?
면접은 ‘기업에 맞는 유능한 인재’를 뽑는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기업이 좋아할 만한 답을 잘 암기했는지를, 얼마나 그럴싸한 가면을 썼는지를 평가하는 시험 같았다. 이러한 가면도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마련한 거라면 건강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문제는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공채에 합격해서 이루고 싶은 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서 하는 노력이 과연 내 인생을 얼마나 확장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회사 생활을 먼저 해본 선배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자 선배가 말했다.
“누구나 회사에 다니며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것들을 참고 노력해. 네 말대로 다들 그 과정에서 염증을 느끼지. 하지만 사회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어쩔 수 없잖아.”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왜 사람은 위로만 올라가야 할까? 흔히 인생에도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직선으로 쭉 뻗은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런데 지그재그나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살면 안 될까? 가성비와 효율을 따지기보단 내키는 대로 시행착오를 거치고, 익숙한 세상을 떠나보고,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마주하면서.
반면 내게 주체적인 삶의 모델을 보여준 이들도 있었다.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대기업 입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선배를 만났다. 자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선배는 작가로서 우뚝 서기 위해 독립출판을 준비하는 등 분주히 노력했다. 보통은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가고, 퇴근 후 글을 쓰는 선택을 한다. 선배가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좋아하지 않는 일에 억지로 노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지프스가 매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것처럼 모든 일은 같은 과정을 지겹도록 반복해야 한다. ‘이번만 꾹 참고 하자’며 취업을 위해 공인회계사시험에 통과해도 하기 싫은 노력엔 끝이 없다. 회사에 들어가면 매일같이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자꾸만 시계에 눈이 가고, 출근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에 시간을 쏟는 건 인생이 아깝다는 게 선배의 결론. 그러니 좋아하는 일에 임하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했다.
집 앞 서점을 운영하던 언니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듯했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던 언니는 회사에 다니다 책을 읽으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직접 서점을 차리게 됐다고 한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덕에 휑했던 주택가가 활력이 돌았고, 늘 고양이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난 틈만 나면 그 공간을 찾던 이들 중 하나였다. 단골이 된 지 1년쯤 지났을까. 하루는 평소처럼 혼자 바쁘게 서점을 운영하던 언니가 말했다.
“저 서점을 다른 분께 넘기고 덴마크에 가려고 해요.”
난 화들짝 놀라 물었다.
“갑자기 덴마크? 여행 가시는 거예요?”
언니는 담담했다.
“아니요. 거기서 일해보려고요. 인생은 여행이잖아요. 사람은 마음이 따르는 길을 가야 해요.”
그리고 며칠 뒤 정말 사라졌다. 언니의 자리는 다른 분이 메꿨다.
꼭 멀리 떠나야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문득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싶었다. 학력과 지역 같은 것들로 날 설명하기 어려운 곳에서 살아가면 투명한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황하며 다른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날 다각적으로 관찰하면 어떨까? 남은 20대 몇 년 동안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내 생각을 듣고 한 친구는 말했다.
"야, 그게 뭐야. 미래가 없잖아."
미래가 없다는 말이 좋았다. 내게 영감을 준 건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렇게 한국, 그리고 대학 시절 교환학생을 갔던 나라까지 포함하면 총 5개의 나라에서 살아보게 됐다.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싶던 청춘이었고, 사실 가보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남들보다 한참 뒤처지는 건 나름의 여유를 줬다.